혜천의 Travelog


보길도의 동쪽 끝 막다른 깍아지른 해안 절벽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1689년 제주도로
유배가던 중 풍랑을 만나 상륙 했을때 자신의처지를
 한탄한 한시를 해안절벽에
새겨 놓은것이 후세에
"우암송시열 선생 글씐바위"  유적지가 된 곳이다.

우암 송시열선생의 글씐 바위가 있는 지도 모르고
보길도에 왔는데  여행중 여행 안내책자를
들추니
 선생의 유적가 있는 것을 알고 횡재를 만난 여행코스였다.

바위절벽에 암각되어 있는것 뿐이니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은
실망을 하며 돌아간다. 하기사, 먼길을 걸어 들어 왔는데
주위에 볼것은 글 몇줄 새겨 놓았는데 , 글씨도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되어 있으니 그럴수 밖에 없을것이다.

이곳을 재미있게 볼려면 우암송시열선생과 고산 유선도 선생 그리고
4색당파 싸움에 대해 사전에 알고 가면 재미있게 볼수있는곳이다.

앞으로 여행갈 사람을 위해 좀 상세히 적어 봅니다.



우암 송시열 그는 누구인가 ?
우암 송시열 글씐바위가 있는 이곳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가
 은둔생활을 하며 ‘어부사시사’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곳으로,
 정치적 사상이 남인과 서인이라는 전혀 다른 길을 간 두 사람이
 보길도라는 섬에 남긴 인연을 어떻게 설명 해야할까?

고산과 우암은 각각 남인과 서인에 속하며 당시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정적관계였다. 또한 두 사람은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었으며 같은 시대인으로는 드물게 80을 넘게 살면서  다섯 임금을
 섬겼는데 두 사람간에 벌어진 치열한 정치적 논쟁은 당시의 극명한 정치적 상황을 말해준다.

나이로 본다면 고산은 선조 20년(1587년)에 태어났고 우암은 선조 40년(1607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고산이 20세 더 많은 셈이었다.

   이 글을 쉽게 이해 할려면 아래 4색당파시절의 당쟁구조도를 먼저 보시고 글을 읽으시면
    도움이 될것 입니다.



효종이 사망했을 때 윤선도 등 남인들이 3년 상을 주장하는 것에 비해 송시열은 기년 복(1년 상)을 주장한다는 것이다.이때는 1년 기복을 주장한다는 것은 정통 성리학을  부인한다는 해석도 가능한 것이어서 논쟁의 소지가 다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이후 남인들은 서인에 대한 반격의 정치공세로 예송논쟁을 제기하고 나서 예송논쟁은 뜨겁게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예송논쟁이 무어냐 하면 
상을 3년상으로 하느냐, 1년상으로하는냐는 문제를 놓고 남인 윤선도와  서인 송시열 간에
 정치적 논쟁을 사활을 건 문제였다.
  
인조의 부인이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당시 집권당이 서인들이었기 때문인지 서인들이 주장하는 1년 복으로 정리되면서 서인들이 승리하였다.

적통에 대한 논란이 매우 예민할 수밖에 없듯이 남인들은 정치적 대 반격을 가하는데 예송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비화시키며 상소를 올린 인물이 고산 윤선도였다.

시간은 흘러 현종이 집권을 하고 있을 때 효종의 비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을 떠나므로 인해 발생한 2차 예송논쟁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남인들로 인해 서인들이 정권에서 몰락하고 남인들이 정권을 잡게 된다.
 
이는 철저하게 서인들로부터 탄압 받았던 남인들의 서인들에 대한 복수이기도 하였으며 일종의 만년 야당인 남인이 모처럼 정권을 잡는 것이기도 하였다.

 예전의 정치판이나 지금의 정치판이 조금도 다른것이 없음을 느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후에도 서인들과 남인들은 또다시 집권을 놓고 쟁패를 거듭하는데 서인의 영수로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송시열도 숙종 때에는 예송논쟁으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 된다. 

 막강한 장희빈에게 도전한 우암송시열,그는 성리학자의 외골수 였나?
숙종 시대에는 장희빈이 낳은 아들의 적통을 놓고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싸운 시기이기도 하였다.
숙종은 서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희빈을 통해 얻은 장씨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정하는데 이 원자에 대한 정통성을 정면으로 제기하고 나선 인물이 송시열이었다.

당시 왕권에 대한 정면도전은 죽음을 걸어야 했던 것으로 송시열은 공신에 대한 예우로 죽음은
 면하고 제주도로 유배 길에 오르지만 결국 그는 다시 국문을 받기 위해 올라오던 도중 사약을
마시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가 제주도 유배 길에 평생 정적으로 상대해야 했던 고산 윤선도의  보길도에 들렀던 것은 우연이었는지는 몰라도 참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없다.
 
송시열은 이곳 보길도의 동쪽해안 암벽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여든 세 살의 늙은 이 몸이 거칠고 먼 바닷길을 가노라 한 마디 말이 어찌 큰 죄가 되어
세 번이나 쫓겨나니 신세가 궁하구나 북녘 하늘 해를 바라보며 남쪽 바다 믿고 가느니
바람뿐인데, 초구에는 옛 은혜 서려 이 감격한 외로운 속마음 눈물짓네” 
                                                             ( 위 암각 사진과 아래 비문 참조 )




 고산 윤선도는 현종 12년인 1671년 보길도에서 8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고, 송시열은 숙종15년(1689년) 82세에 사약을 마시고 죽는다. 둘은 서로 다른 당파로 인해 치열하게 싸우다가 자연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것을 정치판 숙적이 뭔지 요즙 정치인들 이 글 읽고
좀 느꼈으면 좋으련만...

전남 보길도 우암 송시열의 글씐바위의 암각이 이런 사연을 가진곳이다. 그런데 보길도 여행에서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많은것 같아 안타까웠다.
 

Posted by 혜 천
고산윤선도 선생의 시 두편을 읽고 학리 포구로 발길을 옮겼다. 학리 포구에서 바라보는 일광해수욕장의 경치는
가까에에서 보는 맛과 또 틀린다., 일광해수욕장, 이천포구,이동포구등이 한눈에 들어 온다.



학리포구에 들어서자 입구에 정자가 하나 서있다. 나그네들 쉬어 가라고 만들어 둔것 같다. 이곳에 앉아 왼쪽으로 눈을 돌리니 일광해수욕장의 백사장이 보이고 맞은편엔 이천포구의 붉은 등대가 보인다. 눈을 오른쪽으로 돌리자 이동포구의 벽화방파제가 아련히 보인다.
 
쉬는것을 접고 학리포구로 들어 서니 곳곳에서 출어준비에 바쁘다. 동네 아낙들은 장어 주낚을 준비하고 있다. 붕장어낚시 준비용 채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온동네가 부업으로 집집마다 낚시에 미낄르 끼우는 작업을 한다 . 골목마다 미끼를 끼워둔 주낚들이 몇통씩 수거를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많은 량을 준비해서 바다로 나가야 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에 준비하여 바다에 던져두고 밤에 고기들이 미끼를 좋아 하다가 낚시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고 걸려드는 놈들을 익일 새벽 어부들이 건져 올려 잡아오는 것이다.
 

잡아온 장어들은 주로 칠암등 횟집으로가고 전국판로로 팔려나간다고 한다. 이곳에서 죽성으로 넘어 가야 되는데 산불 예방기간이라 톨로를 막아두어 큰길로 나서 죽성리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Posted by 혜 천
31번국도 따라 걷는 도보여행코스 제 7  편  이을포와 일광해수욕장

 칠암포구 →동백포구 → 이동포구 →이을포와 일광해수욕장 → 학리포구

바다와 일광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이르면 기장 아홉포구중 하나인 이을포(伊乙浦)가 나온다.
이 이을포를 요즈음에는 이천포구라고 한다. 이천은 이동서, 이동, 이천동 세개의 마을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행정단위 마을이 이천리이며 그 마을 앞 바닷가가 이천포구이다.


일광 찐빵으로 유명한 찐빵 거리에서 바닷쪽으로 내러오면 소나무가 많이 있는곳이 강송정이며 옆으로 일광천이 흘려내려 오고있다. 일광천을 기준으로 왼쪽이 이천리, 오른쪽이 삼성리 일광해수욕장이며 일광천의 끝자락 이을포이다.

이을포의 옛이름은 얼개라한다. 이을포를 얼개로, 이을개를 줄여서 얼개라 하며 이을개는
 "잇은개(連結浦)라는 말로 漁梁이다. 어량이라는 말의 속어가 얼개라 한다. 경상도 시골이나 갯가에서 많이쓰는 단어 였다.
 
대나무나 가는나무들로 엮어 만든 고기잡는 장치로 바다물이나 강물이 한군데를 막아 놓고 그곳에 얼개로 둘러치고 끝부분에 통발을 놓아 고기를 잡는장치이다.



일광천 하류에 간조와 만조의 차를 이용해서 얼개를 놓아 고기를 잡곤 헸던 이곳 이을포가
 소설가 오영수의 갯마을 소설 실제 무대 였다.

그래서 이곳에 오영수 갯마을 문학비가 서있다. 그리고 이을포구 시장 뒤편 느티나무, 느릅나무와 당집이 있는곳이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다. 그래서 길옆에 또 하나의 문학비가
서있다
.



오영수는 언양에서 태어나 1943년부터 해방 될때까지 일광에서 살았다. 일광에 손위 누님이 일광초등학교 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때 일광면 사무소에서 임시직 근무를 하며 김동리선생과도 교분을 쌓기도 한다.


기장 팔경중 3경에 해당할 만큼 아름다운 일광해수욕장
일광면 삼성리에 위치한 일광해수욕장은 1953년 문예지에 발표된 오영수선생의 소설 갯마을의 실제무대 이고 1965년 김수용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 상영하자 갯마을의 도시로 소개되었다.그리고 2004년 신하균 원빈주연의 영화 우리형 촬영지이기도 한곳이다.  




고산윤선도 선생이 귀양와서 동생과 이별하며 시 두편을 지은 곳이 일광해수욕장에있는 삼성대이다. 이을포 강송정 끝자락에서 학리포구 1.8 km를 은빛 모래사장을 일광해수욕장이라고 한다. 말그대로 은빛을 내는 백사장이다. 여름이면 가족단위나 젊은이들의 나들이 장소로 유명하다.



고려말 정몽주, 이색,이숭인등 문인들이 반했다는 백사장 중간에 삼성대가 우뚝 서있다. 이곳에 고산 윤선도 선생의 애환이 서려있는곳이기도 하다.

조선 광해군때 광해군의 잘못 대해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 갔다가 다시
이곳 기장으로 유배온 곳이다. 유배된 고산을 만나러 온 동생 과 헤어지며 그 심정을 읊은
 시  2편이 시비로 되어 있는 곳이다. ( 贈別少第 2首 ) 


   여행정보
  1. 찾아가는길
   * 부산직활시 기장군 일광면 삼정리
   * 전화 기장군 문화관광과 : 051-709-4081
             일광면 사무소 :051-709-5214
 2. 교통편
     버스 39번,181번
Posted by 혜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