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천의 Travelog

            

  깜깜한 바다 위에 한줄기 빛으로 뱃길을 열어주는 배의 신호등이 등대 이다.

  등대는 배들이 항구나 포구로 들어오거나 나갈때 잘 보이도록 탑의 모양으로

  섬 ·곶 ·암초 ·여울·항만의 출입구 등에 설치되는데 등대관리인의 유무에 따라

  유인등대와 무인등대로 나누기도 하고, 암초와 같은 곳에 설치되는 소규모의

 것을 
등표, 기둥 모양의 것을 등주라 하여 구별을 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등대 역활보다

 홍보 또는 볼거리제공용으로 만들어지는 조형등대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부산 기장 대변항의 등대라 할수있다. 

 

전국에 수많은 등대가 있고 그중 부산해안에만 80여개의 등대가 있다. 그 등대들 중

이름답고 볼만한 등대들을 찾아보며 그 모습들을 남겨보기로 했습니다.

   오늘은 기장 대변 조형등대 - 젖병등대, 월드컵등대,장승등대, 닭벼슬등대의

   모습을 담아 왔습니다.           


           부산 기장 대변항에는 멸치 배가 들어오는 뱃길을 밝혀 주는  아름다운 등대가 5개나 있다.

 

            등대는 외로움이 뭍어 있는 희망체이다. 어부들의 안전을 위해 외롭게 홀로서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어둡고 적막한  뱃길을 밝혀주는 이정표는 우리같은

            여행객에게겐 아름다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부산 해안에만 80 여개의 등대가 있다니

             한곳 한곳 만나볼 작정이다.

 

                                 연화리쪽에 있는 젖병등대    

 

  

                                            이 등대는등대 지붕위에는 젖꼭지가 천정 역활을 한다.

                                    외벽에는 백여명의 손,발 도장이 찍힌 타일 이 붙어 있다.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등대까지 만들어 세우는 우리의 현실이 여기 서도 나타난다. 

 

 

                                                                               월드컵 등대

 

                                         2002년 FIFA 한일 월드컵 4강 진출과 성공적인 개최를 기념하기 위하여

                                 부산지방 해양수산청이 기장군 대변항에 월드컵 등대를 설치했다

 

 

 

 

                

                                                                    장승등대

                                                          기장 대변 외항 앞바다에 장승등대가 있다.

                                                          흰색 과 노란색 장승모양의 등대 한쌍이 이곳을 드나드는

                                                           배와 어부들의 안전을 지켜 주는 일종의 수호신 역활을 한다. 

 

 

                                            노란색 장승등대( 지하여장군) 는 들어오는 선박과 어부들을 무사하게 조업을 하고  

                                    돌아 왔다고  반기는듯한 모습 

 

 

 

                                             흰색 장승등대는 고기잡이 나가는 배들과 어부들에게 무사히 만선해 돌아 오라고 

                                    배웅하듯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이 흰색등대는 일명 마징가 등대라고도 한다. 방파제 위에세워진 등대의 윗부분이 

                                    일본 만화 영화 마징가 Z에 나오는 로봇같아서 부르는 별칭이다. 

 

                                                                       

                                                                               닭벼슬 등대

                                     외항과 내항 중간에 설치된  닭벼슬 등대( 관직과 성공을 의미하는 등대)

 

                                

                                                 내항에 들어온 선박들의 길을 인도 하는 대변등대

 

여행정보

1. 찾아가는길

 위치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

 전화 : 기장군 문화관광과 055-609-4082

2.교통편

  * 열차 : 동해 남부선 -기장역 하차 ( 버스 이용  대변항)

  * 시외버스: 기장읍 버스정류소하차 → 버스이용 대변항 

  * 시내버스 : 181번 ( 해운대역 - 기장전화국 - 교리 -대변항)

  * 자가용 : 동부산관광도로 - 연화리 - 대변항 

 

3. 먹거리

   * 연화리 횟촌 과 대변횟촌 이용.

   * 기장특산물은 기장 멸치 젖갈, 기장 미역 

 

 

Posted by 혜 천

 
월전을 벗어 나니 언젠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변에서 월전까지 도로를 확장했다는 비석이 서 있고 그 뒤 바닷가에 흰등대가 하나 서 있는데 광계말 성화등대이다. 포구도 아닌데 왜 등대가 있을까? 도로쪽에서는 철조망이 쳐져있어 들어 갈수가 없었다, 등대옆에는 해안경비병들이 철수하고 지금은 비어있는 초소가 그대로 있다. 얼마전까지 해안경비초소라 근접하기가 껄끄러웠는데  경비병아 없으니 오히려 이상하다.
 
이곳 광계말등대 주변을 소공원화 한다며 도로변에 큰건물들을 세워고 있다. 공원을 만드는데 무슨 건물부터 먼저 세우는지 모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 그대로 두고 최소한의 곳만 손대면 좋을 텐데 우리네 관공서는 공원만든다면 무엇인가부터 세워야 직성이 풀리는가 모르겠다.   광계말 성화등대 가까이 가기에는 아직도 철조망이 가로 막고 있다.  



                 일제시대 만(灣)의 남각 즉 월전의 남방에 돌출된 갑각(岬角)을 광계말(廣溪末)이라고 부르며,
                 부근에 암초가 많고
조류가 급격하여 어선이 누차 남파하는 곳으로 , 일본어민은 이곳을
                "아랫태합"이라고 불렀는데 아마도 도모포는 원래 만호의 땅으로 사방을 석성으로 둘러 쌓았다고 한다.
                 한국수산지 기장군 읍내면 항목(519쪽)에 적고 있습니다. 석성은 아마 기장 죽성 왜성을을 말하는듯
                 하다.

                조선시대부터 두모포는 조선수군의 중요 요충지로 선박들이 많이 드나들지 않았나 싶다, 두모포항을
                드나드는 곳이 갑각이라 광계말이라 불렀나 싶다.  지금도 부근에 암초가 많이 보인다.


                성화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때부터였는데, 그 때는 성화봉송식과 같은
                의식은 없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는 높은 성화대가 설치되었고, 그리스부터 베를린까지
                성화를 봉송하는 의식이 행해졌다. 1952년 하계 올림픽부터는 올림픽에서의 본격적으로 주요행사
                상징인 성화 , 그모습의 등대가 이곳에 있다.

               
                 광계말등대는 올림픽성화 모양을 본따 만든 등대이며 바다의 풍광이 아주 아룸다운 곳으로
                공원을 만들고 나면 풍광이 아름답워 성화등대가 더 멋진볼거리가 될것같다.
                부산지방해양수산청이 어촌 관광지로 유명한 기장군 죽성리 광계말에 어촌관광자원 조성 및 선박
                안전을 위해 독특한 형상의 등대를 설치하여 지역주민 및 관광객으로부터 좋은 호평을 듣고 있다고
                평을 한다.
              
 광계말 성화등대는  직경 2.4m, 높이 13.5m의 8각 구조로서 성화봉송의 형상을 지닌 등대이며
                 2005년 세워졌다.

                     레스토랑:  아담과 이브 ( 051-724-5316)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409-4


                      월전항에서 송정방향 언덕에 아담한 건물이 있어 들어갔다.< 아담과이브>라는 상호를 가진
                  레스토랑으로 차를 마실수있고, 식사도 할수있는  아름답고 분위기 좋은 곳이 있다.  
                  이곳에서 앉아 월전등대와 죽성리 드림성당도 보이고 광계말 성화등대를  차를 마시며 볼수있어
                  다음에 다시 찾아 가기로 했다.


 
                  등대 하나만으로 참 아름다운 곳이다. 성화대모습의 색상도 하얀색이라 더 잘 어울린다.
                  겨울 바다와 잘 어울리는 광계말 성화등대 .....  지금은 사진을 좋아하는 사진가들에게 일출장소로
                  많이 알려져있으나 일반여행객들은 그냥 지나치고 있는 등대일 뿐이다.
 
                  광계말 성화등대
                     1. 찾아기는 길 
                         * 부산 직활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270 
                         * 전화 : 기장군 문화관광과 :051-709-4081
                     2. 교통정보 
                         * 월전 ↔대변 간 운행 버스는 없음
                         * 기장시장 ↔ 월전(죽성) 간은 마을버스 6번이 운행  
                         * 기장 군청에서 월전까지 택시는 기본요금 정도.

                      

 

Posted by 혜 천

 

오늘의 등대이야기는 동백포구의 등대 와 이동마을의 등대이야기이다. 일광면 동백리 일대 교남지 등 일부 문헌에서 동백포로 나와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 동백포재현동9리 라 하였다. 동백마을 사람들의 말로는 옛날 송씨.남씨가 먼저 이 마을에 정착해 왔으며그후 주민이 늘어 마을이 형성되자 동구밖에 동백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동백포구 진입로에 서면 포구가 활 처럼 휘어져 오목하다. 그래서인지 포근한 느낌이 든다. 끝자락에 서있는 빨간등대와 흰등대를 보며

등대는 왜 빨간등대 와 흰등대를 사용하고 있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빨간색과 흰색을 사용하는 것도 마음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항로표지 규정에 의해서 사용된다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다음에 등대는 왜 빨간등대 흰등대가 포구 좌우측에 있는지 알아보기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동백포구 동백등대모습

동백리는 어업과 해운을 주로 하던 독이방과는 그 소속을 달리하여 옛날은 기장현 동면 청광방 동백이었고 , 임진왜란 후에 문사동이 울산군에 합병되어 하미면 이동이 되었을때도 청광방에 속하여 있었다. 그후 기장현 동면 동백마을이라는 이름이 처음 공개된 마을이다.

 

 * 동백포구 흰등대

 

  

* 이동포구에서 바라본 한국유리

 

동백포구에서 송정해욕장 방향으로 걸어보자.

먼저 눈에 보이는것이 한국유리공장 굴뚝이 보인다. 한국유리 이쪽 포구가 기포인 이동마을이며, 한국유리 모퉁이를 돌아가면 이천리 일을포구다.  이 이동마을 기포는 사연이 많은 곳이다.  옛날에는 꽤나 컸다는데 이젠 조그마한 포구로 아늑함이 깃드는 마을이 있다.그 포구가 현재는 이동마을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기포였다 이동마을 입구에는 흰바둑돌이 생산되었던 부산수영동에서 세워준 "이동마을"이라는  오래된 표지석이 있다.이 표지석을 따라 내려가면 바로 포구입구이다.


바닷가의 돌이 바둑돌처럼 반지르르하다는 뜻에서 유래된 기포(碁浦)가 바로 이동포구의 옛이름이다.이동" 이라는 이름은 일광 이천의 동쪽에 있는 마을" 이라는뜻이다. 그래서 이천리 이동마을이다.이동(기포)은 현재 전국 최대의 다시마 집산지이다.하지만 이곳 역시 포구는 거의 매립된 상태다.기포를 다른말로 바돌개라고도 한다. 지금도 바닷가 한켠에는 검은 바둑돌들이 많이 깔려있다.

 

 

 

한국역사지명사전에 기포(碁浦)란 지명에 대해 경상남도 양상군(梁山郡)기장면(機張面)에 있는 포구. 검은 바둑돌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고 등록되어 있다. 지금의 일광면 이동(伊東)마을이 이에 속하며, 속명으로 바둑돌이 많았기에 '바돌개'라고도 불려진다고 한다.

 

갯가의 돌이 바둑돌처럼 반지르르하다는 뜻에서 유래했다는 기포라는 지역은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동해 바닷가 차성현(지금의 기장군 기장읍)의 남쪽에 지명이 기포라는 한적한 해변을 거닐다가 희고 검은 바둑알을 주워 가지고 그 생긴 모양에 감탄하면서 '자연기(自然碁)'라는 시를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옛 기록을 찾아보면 동해안에는 여러 포구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 중 基浦는 기록에는 碁浦로 나와 있으며 검은 바둑알이 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기포나 두모포(豆毛浦)와 함께 해안을 방어하는 군사기지와 수륙(水陸)물산을 수송하는 포구로서의 구실을 했고 검은 바둑돌이 나는데 기포(碁浦)라고 부른다.

 

 

  지금은 기장미역과 다시마 특구로 지정되어 최대 생산지 이기도한 포구다. 방파제에 벽화가 그려져 있고 방파제 끝자락에 붉은 등대가

서있다. 낚시배와 미역,다시마를 실어 나르는 배들이 드나들 정도로 한가운 모습이다. 

 

 *이동포구 이동등대

 

 

 

 

등대입구에서 빨간 등대까지 사람키보다 큰 이동방파제 축대에는 벽화를 그려 놓아 한결 신선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젊은이들의 데이트족도 있고 중년부부가 산책하는 모습도 간간히 눈에 띈다.   이곳 이동방파제는 대변항과 학리포구와 더불어 "명방파제100선"에 들 정도로 이름있는 곳이며 영화 " 복면달호":촬영지이기도 하다.

 

Posted by 혜 천


문중포구 는 포구앞 넓다란 공터가 시원하다.  그래서인지 차량과 사람이 많아도 북쩍거리는 느낌이 없다. 포구가 커서인지 드나드는 배들도 조용히 들어 오고 나간다.  문중포구를 옛날 기장 아홉포구에서는 독이포라고 불렀다.

독이포는 현재의 문동리 일원이다. 일광면 문동리일대의 옛마을 이름은 독이방이 었는데 ,독은 나무가 없는 헐벗 산과 같은 민둥이를 뜻으로 이마을 뒷산인 문산을 옛날에는 민둥산이라고 한데서 유래된 마을이다.  임랑에서 부산쪽으로 칠암 못미쳐이지만 요즘은 해안도로가 나있어 칠암과 붙어 있는 포구가 되었다.

문중포구 앞 등대 뒤쪽에는 노란색의 칠암 가자미등대가 서 있다. 문중항 방파제등대는 하얀색의 등대이다. 방파제까지 걸어나가면 칠암등대군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문동리는 광무8년(1904)에 만든 경상남도 기장군 기장읍지에서 중북면의 한마을로서 문사동( 문동,문중,문서,칠암리)에 속하였으며, 1914년 부터 일광면이 되면서 동면에 속했던 동백리와 위 문사동이 합쳐뎌 문오동이 되었다. 문동마을에 옛날에는 해창이 있었으며 이 무렵에 마을이 매우 번창하였다고 전해져 오고 있으며, 해창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이 마을은 속칭 창마을로 불리었다.  이곳에 망해정을 복원하여 역사의 흔적을 볼수있다. 도이포로 불리었던 문오동의 본동은 문동이고 지금 문동을 문리라 부르고 있다. 문동리 안에 있는 창마을이 문상리였다. 기장 독이방은 문동과 문상이다.


 문중항 방파제등대( 문중등대) 개요

*위치: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면 문중리 문중항
* 설치:2002년
* 신평공원을 출발하여 임랑으로 가기전 조그마한 포구에 위치하고 있는 등대로서
        기분전환을 위해 갯내음을 맡으며 한가롭게 방문하기 좋은 등대이다.
복면달호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Posted by 혜 천

 

동해바다와 남해바다의 경계가 기장 임랑이나 고리가 아닐까 싶다, 국도31번을 타고 고리까지 갔다. 탈도 많고 말도 많은 고리원자력발전소 근처 화사을포에서 부터 기장 아홉포구 (九浦)중  독이포의 문중방파제에 있는 등대와 임랑해수욕장 끝자락 화사을포와 월래포등대를 보기로 하고 나섰다. 

월래포구 와 문중 독이포 , 그 곳엔 등대가 있다. 꼬불꼬불한 이 바닷길을 따라 가본 사람은 와∼ 하고 탄성을 지를만한 곳이다. 그냥 망망대해에 파도만 보인다면 와- 소리를 지를리 없다. 저 아래 내려다 보이는 조그만 포구 양켠에 등대가 있다. 같은 색깔이면 눈에 잘 띄질 않을 것인데 한쪽은 빨간색 등대, 건너편엔 흰등대가 조화를 이뤄 아름답다  

기차를 타고 월래역에 내리면 더 정취를 느낄수있는 그런 곳이다. 월래역도 오래된 간이역 처럼 이쁘다. 그 격앞으로 걸어 나오면 큰 고목나무가 있는 당집도 있고, 조선시대 보부상을 했다는 보부상비석도 3기 볼수있다. 시내를 가로 질러 월래포구에 나서면 저 만치 등대가 기다리고 있다. 월래포구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달월(月)를 쓰고 있으니 자연 이야기 꺼리를 내포하고 있는 마을이다.  

 * 월래포의 월래등대 

월래포의 옛이름은 월래(月來)이었고, 1681년 기장현 중북면 월래가 을미개혁으로 기장군 중북면 우래동으로 동명이 처음 공식 인정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정비때 동래군 장안면 월래리가 되었다.  마을 주민 사이에 구전되고 있는 마을의 유래를 보면 " 마을 북동편 월래천 옆에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지만 200평가량의연지가 풀숲에 덮인채 있었다. 

 밤이되어 동천에 뜬 달이 연지에 비치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연지에서 솟아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 연지를 소량강 즉, 밝고 맑은 향풀이 가득한 강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었다. 달이 큰 연지 안에서 뜨는 마을이라하여 월호라 칭하다가, 고종3년 (1864)에 와서 달이 동리 안에서 뜬다하여 월래라 불렀다고 한다." 

 * 월래포의 월래등대 

차성가에도 " 동산상에 달떴으니 월호에 선유한다." 라고 하여 월호가 나온다, 월내천을 따라 올라가보면 장안사를 만날수 있고, 월래역 인근에 3기의 보부상비가 있다. 

* 월래역

 

* 보부상비

 

* 월래역 앞 당집  

 월래포구 옆이 고리원자력 마을이다. 그마을도 옛날엔 화사을포라고 불렀다.

장안읍에 속하는 고리를 옛날에는 아이포라 하였는데, 기장현 상북면 아이포를 거쳐 화사을포가 되었다. 아이포는 작은 개 또는 작은 포구라는 뜻도 있는데, 옛 사람들은 작다는 말을 아이로 표현했고 한다, 이를 그대로 차음하여 아이로, 그리고 개또는 물가를 차훈하여 포라 하여 아이포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봉화대가 설치되면서부터 화사을포라 불리어졌고, 불을 사르다와 갯가를 합쳐지어진 화사을포가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 마을이름을 두글자로 불리어지는 것ㄹ이 통례임에 비추어 화포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통신수단의 발달로 봉화불이 없어지게 되자 화포라는 마을이름이 명분을 잃게 됨에 따라 새로운 고리(古里)로 이름지어졌다.

 

1969년에 한국전력 고리원자력발전소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건설되면서 주민없는 마을이 되어 이름만 남게 되었으며, 이 마을 이름이 화사을포, 화사포,들 불과 관계를 맺어 왔는데, 마침내 제3의불로 불리는 원전이 건설되었으니 , 옛 조상들이 지명에 대한 혜안을 다시 한번 더 느끼게 하고있다.

  

 

임을랑포일광면에서 나룻배르 타고 장안읍 임량리로 가던 나룻터인 임량진이 있었던 곳이며, 지금은 기장팔경중 하나인 임량해수욕장이 있어 바다의 풍광을 즐기는 곳이다.  장안읍 임랑리 해변에 있는 해수욕장이다. 예부터 월내해수욕장과 함께 임을랑포라 하였다.

 

* 임랑해수욕장 

임을랑포라는 지명은 주된 성책이 있는 갯가라는 뜻으로 임책(任柵)의 옛말이다. 차성팔경의 하나이다. 백설 같은 백사장이 1킬로 넘게 넓게 깔려 있고 남쪽에는 임랑천의 맑은 물이 백사장을 가로질러 바닷속에 잠긴다.백사장 주변은 노송이 큰 가지를 펴고 병풍처럼 푸른 숲을 이루고 있다. 근래에 관광객이 제법 붐비고 있지마는 아직은 호젓하고 조용한 곳이다.
 
예전 사람들은 이곳 임랑천의 맑은 물에서 낮에는 천렵을 하고 놀다가 병풍처럼 펼쳐진송림 위에 달이 떠오르면 님과 함께 조각배를 타고 달 구경을 하면서 뱃놀이를 즐겼다.동산에 달이 뜨고, 임랑천에 달이 있고, 천파만파 잔잔한 물결 속에 수천수만의 달이 잠기고,백사장에 달빛이 서리고 님의 얼굴이 달덩이 같고 내 마음이 달과 같다 하였다. 그래서 예부터 이곳의 월출경을 차성팔경의 하나로 손꼽는다.  

  정관 병산에서 발원한 좌광천이 동해바다와 만나는 곳인데, 임진왜란때 기장의 도자기 등을 싣고 갔던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제철산업을 중흥시킨 박태준 전 국무총리의 생가가 있는 마을이며, 임진왜란때 축성한 임랑포왜성이 있고 물길 건너에는 임랑포 봉수가 있다.  

* 한때 미성을 자랑했던 가수 정훈희가 운영하는 카페 

        * 성철스님, 청담스님,서옹스님등 한국불교계를 이끌었던 유명 스님들이 수행했던 수행처 묘관음사 

 묘관음사는 근대에 들어와 향곡당 혜림스님께서 창건하셨으며. 이곳 묘관음사는 우리나라의 선맥을 이어온 혜월, 운봉, 향곡스님과 해운정사의 진제스님 그리고 성철큰스님께서 수행한 곳이라 더욱 유명해진 사찰입니다. 경내에는 전각, 대웅전,조사전,삼성각,종각이 있으며 당우는 길상선원,심원당,산호당, 법중대,금모대, 행로각과 각종편의 시설이 갖춰져 있으며 운봉,향곡,두분선사의 부도탑이 모셔져 있다.

성철스님께서 묘관음사에서 수행하실적에 스님의 출가전 따님이 기장 묘관음사에 아버지를 보러왔다. 

불필스님이 되기전 성철스님의 필요없는 딸 수경과의 첫만남  장소가 기장월래의 묘관음사였습니다.
성철스님은 출가하고 얼마 지나 세속에 떨치고 온 부인이 딸을 낳았다는 얘기를 풍문에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 따님이 바로 불필(不必) 스님이다. '필요 없는 딸' 이란 법명이다.  불필스님은 1937년 5월 아버지 이영주(성철스님의 속명) 와 어머니 이덕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가한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수경(壽卿) 이었다. 지금은 그런 모습이 사라졌지만, 당시 고향 묵곡마을은 아름다운 경호강이 끼고 돌아 마치 강물에 둘러싸인 조용한 섬 같았다고 한다.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살수 있다고 할 만큼 넉넉한 집안이었기에 일제 식민지하에도 불구하고 수경의 유년시절은 남부럽지 않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를 처음 뵙기 전까지 수경에게 아버지란 그저 상상 속의 인물이었다. 불필스님은 "아버지가 스님이란 사실은 어려서 누군가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그저 동화 그림 속에서 나오는 사람인가 싶은 정도" 라 기억했다. 문제는 당시 낮았던 스님들의 사회적 위상이었다. 불필스님은 "보지도 못한 아버지인데, 스님이라는 게 싫었다" 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님의 딸" 이란 소리를 듣기 싫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과 함께 "아버지는 세상 등지고 가족도 버리고 산 속에서 무엇 하는 것인가" 하는 고민도 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어린 소녀는 아버지가 스님이란 사실을 감추고자 했으며, 속으로 감추면 감출수록 아버지와 불교에 대한 궁금증은 새록새록 피어났다. 조숙하고 총명했던 수경은 그렇게 아무도 모를 고민이 많았다.  

수경은 초등학교 4학년 때 할아버지에게 "사람은 나면 서울로 가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낸다" 는 옛말을 인용해가며 "서울 유학을 보내달라" 고 졸라 상경, 서울 혜화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 집안 살림이 넉넉했던 가문에서는 흔히 자식들을 서울로 유학을 보냈고, 이미 삼촌(성철스님의 동생) 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서울 초등학교의 수업은 시골 학교와 놀랄 정도로 차이가 컸다. 어린 나이로 서울 생활 적응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스님이란 사실은 아무도 몰랐기에 큰 짐을 벗은 것처럼 마음은 홀가분해 날아갈 것 같은 심정" 이었다고 한다.  

처음 아버지를 만나게 해준 사람은 묘엄(妙嚴.현 수원 봉녕사 승가대학장) 스님이었다. 묘엄스님은 성철스님과 절친한 청담(淸潭) 스님의 딸이다. 어느날 묘엄스님이 다른 비구니 스님과 함께 수경을 찾아왔다. "큰스님께서 경남 월래 묘관음사에 계시니 한번 가서 뵙도록 하자. "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에 얼떨떨해 있는데, 서울에 같이 유학와 있던 삼촌이 "담임선생님께 스님을 찾아간다고 허락을 받고 한번 가보자" 며 나섰다. "평생 불러보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아버지가 대체 어떤 모습일까" 하는 호기심 반(半) , 자식을 팽개친 아버지에 대한 미움 반(半) 에 "얼굴이라도 보자" 며 삼촌을 따라 나섰다.  

삼촌을 따라가면서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미워한 아버지인데, 그래도 찾아 나서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 이것도 천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기차를 타고 묘관음사에 도착하니 해질 무렵이었다. 산기슭을 따라 올라가니 누군지 모르는 무섭게 생긴 스님 한 분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스님이 바로 성철스님과 절친한 도반(道伴) 인 향곡(香谷) 스님이었다. 향곡스님이 말했다.  

"철수좌(성철스님) 가 오늘 이상한 손님이 온다더라면서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

수경은 몹시 기분이 나빴다. 친혈육인 자신을 그렇게 내팽개쳐 놓은 아버지, 그래서 원망스러웠던 아버지가 애써 찾아온 딸을 피해 사라지다니. 향곡스님이 뒤늦게 사실을 알고는 성철스님을 찾아 나섰다. 조금 기다리자 향곡스님이 다 떨어진 누더기에 부리부리하게 광채나는 큰 눈만 보이는 스님과 함께 나타났다. "저 분이 내 아버지인가" 하는 순간 눈 큰 스님이 소리를 질렀다.  

"가라,가!"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 있던 수경은 그 순간 "삼촌 돌아가요" 라며 돌아섰다. 그 때 무서운 얼굴의 향곡스님이 부드러운 미소로 붙잡았다. 자그마한 방으로 데려가선 과자며 과일이며 먹을 것을 내놓았다.  이렇게 성철스님과 딸 수경은 첫만남이 있었다., < 출처 :   ??  >

Posted by 혜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