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천의 Travelog


두가족이 산행과 여행을 겸한 나들이를 떠났다.
 한가족은 서울에서 KTX로 밀양에 도착하고,
 다른 가족은 부산에서 밀양으로 가서 ,
 밀양역에서 만나 ,
 밀양 표충사 방향 바드리마을
 다산농원에서 1박 하기로 하고 출발했다 .


이곳 다산 농원은 해발550 m 에 위치한
 산골 마을이지만 경치가 끝내주는 곳이었다.


뒤로는 백마산 ,
 앞을 보면 향로산 그리고 굽이굽이 겹치는 높고
 낮은 산의 물결로 이루어져 있고 ,
그 속에 밀양땜의
호수가 자리 잡은 모습을 보노라면 마냥 좋은 곳이다.


 
                       밀양시민들의 식수로 사용하기위해 만들어진    밀양땜


                          *** 무릉도원에 비견했던 고야천 상류 인  밀양땜 *****
                                아홉구비 폭포마다 성난 물이 부딪치고
                                낙화는 가이 없이  물결 따라 쓸려가네
                                 반생토록 몰랐어라  도원길이 어드 멘지
                                오늘에사 만났거늘  조하옹이 신기하네

                                                                           점필재  김종직

      점필재 김종직은 밀양출신으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師祖로
     <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불러 일으키겨 한 조선시대 성리학자의 서당이 밀양에 있다.


    밀양땜이나 평리 바드리 마을에서 동북쪽을 쳐다보면 우뚝 솟은 봉우리가 보이고 봉우리 밑에바위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저 있는 산이 백마산이다. 표충사 가는 방향 삼박골 입구 에서 차도를따라 4.5 km 걸어 올라 오니 해발 550m 에 자리한 바드리 마을이 나온다.

오늘은 이곳 다산농원 에서  여장을 풀고 하루 밤을 자고 내일 오전에 산행키로 한다  이곳 다산 농원은 흑염소 전문 식당 겸 평리마을 체험마을을 운영하는 곳이었다. 거금을 들여 염소고기 맛을보고  밤이 되자 제법많은 비가 내린다. 내일 산행을 걱정하며  하루밤을 지내고 아침이 되니 비는거치고 안개가 자욱하다. 아침후 산행미참석할 사람은 인근에서 산나물을 채취하고 그외 사람은
산행을 시작했다

        *** 오늘 산행의 백마산 정경                    *** 흑염소방목장 - 이곳 철책문을 열고
                                                                        통과후 임도로 통하는 길이 있다

       *** 백마산 이정표                           *** 백마산성 : 임진왜란때 피란과 관련된 전설이
                                                                있고 성둘레 1.5km ,높이 3m 성벽이 있다

      **  백마산 정상 776 m                                 ****   정상에서 본 안개속의 향로산   

 


       ****  천  태  호 **** 

      굽이치는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삼랑진   천태산 (631m ) 정상 부근에 위치한 천태호.    
      양수 발전을 위해 아래쪽 안태호에서  물을 퍼올려 만든 호수로  주위경관이 아름다답다


    

Posted by 혜 천

점필제 김종직선생은 누구인가?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시조라고
할수있다. 

경남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에 있는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생가 추원제 와 묘소 와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의 예림서원을 둘러보고 영남 유림의 대표
김종직선생의  곧은 성품과 그 학문 의 고향 을 찾아본다.

우리가 김종직 선생을 알게 된것은 역사공부를 하면서
영남을 대표하는 유림인이며,성리학자로  조의제문
으로
인하여  무오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한 역사적인 사건의
 인물로 알고 있다.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 조의제문"을 지어 "무오사화"의 별미를 제공한 사연이 있는 곳이다. 조의제문과 무오사화가 어떤 일인가를 부연하면

 * 조의제문 - 세조가 단종으로 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한 글이 조의제문이며  번역된 글을 아래에 적어본다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四大/물水,바람氣,땅地,불火) 오상(五常/인仁,의義,예禮,지知,신信) 을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中華)라서 풍부하고 이적(夷狄)이라서 인색한 바 아니거늘,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을손가. 그러기에 나는 이인(夷人)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하노라. 옛날 조룡(祖龍) 이 아각(牙角)을 농(弄)하니, 사해(四海)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네. 비록 전유(鱣鮪), 추애(鰌鯢)라도 어찌 보전할손가. 그물을 벗어나기에 급급했느니, 당시 육국(六國)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편맹(編氓)가 짝이 되었다오. 항양(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종(將種)으로, 어호(魚狐)를 종달아서 일을 일으켰네.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름이여! 끊어졌던 웅역(熊繹) 의 제사를 보존하였네. 건부(乾符) 를 쥐고 남면(南面)을 함이여! 천하엔 진실로 미씨(芈氏) 보다 큰 것이 없도다.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關中)에 들어가게 함이여! 또는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겠도다. 양흔 낭탐(羊狠狼貪) 이 관군(冠軍) 을 마음대로 축임이여!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 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아아,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에 있어, 나는 왕을 위해 더욱 두렵게 여겼네. 반서(反噬)를 당하여 해석(醢腊) 이 됨이여,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려. 빈의 산은 우뚝하여 하늘을 솟음이야!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에 가깝고.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흐름이여!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르도다. 천지도 장구(長久)한들 한이 어찌 다하리 넋은 지금도 표탕(瓢蕩)하도다. 내 마음이 금석(金石)을 꿰뚫음이여!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네. 자양(紫陽)의 노필(老筆)을 따라가자니, 생각이 진돈(螴蜳) 하여 흠흠(欽欽)하도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흠항하소서.

 * 무오사화 - 조의제문 상소후 수년이 지난뒤 사관에 수록한 조의제문의 내용을 문제삼아
                  부관참시
  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불살라 진사건을 무오사화라 한다.

'무오사화(戊午史禍)란

사건은 1498년 무오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1498년 실록청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실록 작 업의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점검 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과 이극돈 자신을비판하는 상소문을 발견했다. '조의제문'은 진나라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한 일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 글에서 김종직은 의제를 조의하는 제문 형식을 빌려 의제를 폐위한 항우의 처사를 비판하고 있었다. 이는 곧 세조의 단종 폐위를 빗댄 것으로 은유적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나머지 상소문은 세조비 정희왕후 상 중에 전라감사로 있던 이극돈이 근신하지 않고 장흥의 기생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적은 것이었다. 당시 이 상소 사건으로 이극돈은 김종직을 원수 대하듯 했는데, 그것이 사초에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달려간 곳이 유자광의 집이었다. 유자광 역시 함 양관청에 붙어있던 자신의 글을 불태운 일 때문에 김종직과 극한 대립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김종직은 남 이를 무고로 죽인 모리배라고 말하면서 유자광을 멸시하곤 했다.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읽어보고는 곧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상 등의 훈신 세력과 모의한 뒤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은 뻔했다.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방한 글이므로 김종직은 대역 부도한 행위를 했으 며 이를 사초에 실은 김일손 역시 마찬가지라는 논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연산군은 사림 세력을 싫어하던 차였다. 그래서 즉시 김일손을 문초하게 하였다. '조의제문'을 사 초에 실은 것이 김종직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의도하던 바 대로 진술을 받아내 자 연산군은 김일손을 위시한 모든 김종직 문하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미 죽은 김종직에게는 무덤을 파서 관을 꺼낸 다음 시신을 다시 한 번 죽이는 부관참시형이 가해졌으며,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능멸하였다는 이유로 능지처참 등의 형벌을 내렸고, 같은 죄에 걸린 강겸은 곤장 10 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그 밖에 표연말, 홍한, 정여창,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등은 불고지죄로 곤장 100대에 3천리 밖으로 귀 양보냈으며, 이종준, 최보, 이원,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명, 강혼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 로서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하고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목으로 곤장을 때려 귀양을 보내 관청의 봉수대를 짓게 하였다. 한편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김전 등은 수사관(실록 자료인 사초를 관장하는 관리)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으며, 홍귀달, 조익정, 허침, 안침 등도 같은 죄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신진 사림이 죽거나 유배당하고 이극돈까지 파면되었지만, 유자광만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 아 조정의 대세를 장악했다. 이에 따라 정국은 노사신 등의 훈척 계열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초가 원인이 되어 무오년에 사람들이 대대적인 화를 입은 사건이라 해서 이를 무오사화라고 하는데, 이 사건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굳이 사화(士禍)가 아닌 사화(史禍)라고 쓰는 것은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이다.  



추원제는 밀양시내에서 무안쪽으로 가는 산 기슭에 있다.
 집앞뜰은 넓은 편이지만 집은 건물이 작고  마당도 넓은 편이 아니다.  집앞에는 선생의 흉상이있고 흉상옆에는 선생의 추모비가 있다.

 추원재는 사림파 유학자들의 정신적 고향이며 점필제 선생 사후 유림인들이 이곳을 찾아 선생의 학문을   숭상하던 곳이 되었다.  


     선생의 묘소는 집 오른편으로난 오솔길을 걸어 산으로 조금  오르면 나타난다.
     무덤은 호석이 둘러쳐저 있지만 가파른 산 언저리에 자리잡고 있다.

                               형조판서 증 영의정 점필제 신도비각  

    예림서원은 추원제에서 그리 멀지않은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 있어
선생의 흔적을
    찾기위해 둘러 볼만한 곳이다.
 
     예림서원은 정면6칸 측면2칸의 목조기와로 지어졌으며  유림후학들을 교육기능과
     공자와 성현들의
 제사를 지내는 기능을 하는곳 이도하다. 

                               독서루는유학생들이 공부하던 문루


       구영당 은 200년이 훨씬 넘은 조선시대후기의 건물  예림서원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는데
  숭정후 기유 사액이란 글씨가 있어 1669년 헌종10년에 사액된 현판이라 한다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에서 일어난 무오사화로 가족들은 밀양에 거주할수 없어
     은거할수밖에 없게된다.
 점필재 깁종직선생의 5대손이  피신와서 은거하여 살며
      집성촌을 이룬곳이 현재 고령 개실마을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묘소와 생가 그리고 예림서원만 있고  그 후손들은 고령 개실마을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한다. 
      
Posted by 혜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