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천의 Travelog

'소론'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1.01.07 성리학의 외골수 우암 송시열선생 보길도 글씐바위 2

보길도의 동쪽 끝 막다른 깍아지른 해안 절벽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1689년 제주도로
유배가던 중 풍랑을 만나 상륙 했을때 자신의처지를
 한탄한 한시를 해안절벽에
새겨 놓은것이 후세에
"우암송시열 선생 글씐바위"  유적지가 된 곳이다.

우암 송시열선생의 글씐 바위가 있는 지도 모르고
보길도에 왔는데  여행중 여행 안내책자를
들추니
 선생의 유적가 있는 것을 알고 횡재를 만난 여행코스였다.

바위절벽에 암각되어 있는것 뿐이니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은
실망을 하며 돌아간다. 하기사, 먼길을 걸어 들어 왔는데
주위에 볼것은 글 몇줄 새겨 놓았는데 , 글씨도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되어 있으니 그럴수 밖에 없을것이다.

이곳을 재미있게 볼려면 우암송시열선생과 고산 유선도 선생 그리고
4색당파 싸움에 대해 사전에 알고 가면 재미있게 볼수있는곳이다.

앞으로 여행갈 사람을 위해 좀 상세히 적어 봅니다.



우암 송시열 그는 누구인가 ?
우암 송시열 글씐바위가 있는 이곳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가
 은둔생활을 하며 ‘어부사시사’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곳으로,
 정치적 사상이 남인과 서인이라는 전혀 다른 길을 간 두 사람이
 보길도라는 섬에 남긴 인연을 어떻게 설명 해야할까?

고산과 우암은 각각 남인과 서인에 속하며 당시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정적관계였다. 또한 두 사람은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었으며 같은 시대인으로는 드물게 80을 넘게 살면서  다섯 임금을
 섬겼는데 두 사람간에 벌어진 치열한 정치적 논쟁은 당시의 극명한 정치적 상황을 말해준다.

나이로 본다면 고산은 선조 20년(1587년)에 태어났고 우암은 선조 40년(1607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고산이 20세 더 많은 셈이었다.

   이 글을 쉽게 이해 할려면 아래 4색당파시절의 당쟁구조도를 먼저 보시고 글을 읽으시면
    도움이 될것 입니다.



효종이 사망했을 때 윤선도 등 남인들이 3년 상을 주장하는 것에 비해 송시열은 기년 복(1년 상)을 주장한다는 것이다.이때는 1년 기복을 주장한다는 것은 정통 성리학을  부인한다는 해석도 가능한 것이어서 논쟁의 소지가 다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이후 남인들은 서인에 대한 반격의 정치공세로 예송논쟁을 제기하고 나서 예송논쟁은 뜨겁게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예송논쟁이 무어냐 하면 
상을 3년상으로 하느냐, 1년상으로하는냐는 문제를 놓고 남인 윤선도와  서인 송시열 간에
 정치적 논쟁을 사활을 건 문제였다.
  
인조의 부인이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당시 집권당이 서인들이었기 때문인지 서인들이 주장하는 1년 복으로 정리되면서 서인들이 승리하였다.

적통에 대한 논란이 매우 예민할 수밖에 없듯이 남인들은 정치적 대 반격을 가하는데 예송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비화시키며 상소를 올린 인물이 고산 윤선도였다.

시간은 흘러 현종이 집권을 하고 있을 때 효종의 비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을 떠나므로 인해 발생한 2차 예송논쟁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남인들로 인해 서인들이 정권에서 몰락하고 남인들이 정권을 잡게 된다.
 
이는 철저하게 서인들로부터 탄압 받았던 남인들의 서인들에 대한 복수이기도 하였으며 일종의 만년 야당인 남인이 모처럼 정권을 잡는 것이기도 하였다.

 예전의 정치판이나 지금의 정치판이 조금도 다른것이 없음을 느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후에도 서인들과 남인들은 또다시 집권을 놓고 쟁패를 거듭하는데 서인의 영수로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송시열도 숙종 때에는 예송논쟁으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 된다. 

 막강한 장희빈에게 도전한 우암송시열,그는 성리학자의 외골수 였나?
숙종 시대에는 장희빈이 낳은 아들의 적통을 놓고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싸운 시기이기도 하였다.
숙종은 서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희빈을 통해 얻은 장씨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정하는데 이 원자에 대한 정통성을 정면으로 제기하고 나선 인물이 송시열이었다.

당시 왕권에 대한 정면도전은 죽음을 걸어야 했던 것으로 송시열은 공신에 대한 예우로 죽음은
 면하고 제주도로 유배 길에 오르지만 결국 그는 다시 국문을 받기 위해 올라오던 도중 사약을
마시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가 제주도 유배 길에 평생 정적으로 상대해야 했던 고산 윤선도의  보길도에 들렀던 것은 우연이었는지는 몰라도 참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없다.
 
송시열은 이곳 보길도의 동쪽해안 암벽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여든 세 살의 늙은 이 몸이 거칠고 먼 바닷길을 가노라 한 마디 말이 어찌 큰 죄가 되어
세 번이나 쫓겨나니 신세가 궁하구나 북녘 하늘 해를 바라보며 남쪽 바다 믿고 가느니
바람뿐인데, 초구에는 옛 은혜 서려 이 감격한 외로운 속마음 눈물짓네” 
                                                             ( 위 암각 사진과 아래 비문 참조 )




 고산 윤선도는 현종 12년인 1671년 보길도에서 8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고, 송시열은 숙종15년(1689년) 82세에 사약을 마시고 죽는다. 둘은 서로 다른 당파로 인해 치열하게 싸우다가 자연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것을 정치판 숙적이 뭔지 요즙 정치인들 이 글 읽고
좀 느꼈으면 좋으련만...

전남 보길도 우암 송시열의 글씐바위의 암각이 이런 사연을 가진곳이다. 그런데 보길도 여행에서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많은것 같아 안타까웠다.
 

Posted by 혜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