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천의 Travelog

 

동해바다와 남해바다의 경계가 기장 임랑이나 고리가 아닐까 싶다, 국도31번을 타고 고리까지 갔다. 탈도 많고 말도 많은 고리원자력발전소 근처 화사을포에서 부터 기장 아홉포구 (九浦)중  독이포의 문중방파제에 있는 등대와 임랑해수욕장 끝자락 화사을포와 월래포등대를 보기로 하고 나섰다. 

월래포구 와 문중 독이포 , 그 곳엔 등대가 있다. 꼬불꼬불한 이 바닷길을 따라 가본 사람은 와∼ 하고 탄성을 지를만한 곳이다. 그냥 망망대해에 파도만 보인다면 와- 소리를 지를리 없다. 저 아래 내려다 보이는 조그만 포구 양켠에 등대가 있다. 같은 색깔이면 눈에 잘 띄질 않을 것인데 한쪽은 빨간색 등대, 건너편엔 흰등대가 조화를 이뤄 아름답다  

기차를 타고 월래역에 내리면 더 정취를 느낄수있는 그런 곳이다. 월래역도 오래된 간이역 처럼 이쁘다. 그 격앞으로 걸어 나오면 큰 고목나무가 있는 당집도 있고, 조선시대 보부상을 했다는 보부상비석도 3기 볼수있다. 시내를 가로 질러 월래포구에 나서면 저 만치 등대가 기다리고 있다. 월래포구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달월(月)를 쓰고 있으니 자연 이야기 꺼리를 내포하고 있는 마을이다.  

 * 월래포의 월래등대 

월래포의 옛이름은 월래(月來)이었고, 1681년 기장현 중북면 월래가 을미개혁으로 기장군 중북면 우래동으로 동명이 처음 공식 인정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정비때 동래군 장안면 월래리가 되었다.  마을 주민 사이에 구전되고 있는 마을의 유래를 보면 " 마을 북동편 월래천 옆에 언제부터 인지는  모르지만 200평가량의연지가 풀숲에 덮인채 있었다. 

 밤이되어 동천에 뜬 달이 연지에 비치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연지에서 솟아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 연지를 소량강 즉, 밝고 맑은 향풀이 가득한 강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었다. 달이 큰 연지 안에서 뜨는 마을이라하여 월호라 칭하다가, 고종3년 (1864)에 와서 달이 동리 안에서 뜬다하여 월래라 불렀다고 한다." 

 * 월래포의 월래등대 

차성가에도 " 동산상에 달떴으니 월호에 선유한다." 라고 하여 월호가 나온다, 월내천을 따라 올라가보면 장안사를 만날수 있고, 월래역 인근에 3기의 보부상비가 있다. 

* 월래역

 

* 보부상비

 

* 월래역 앞 당집  

 월래포구 옆이 고리원자력 마을이다. 그마을도 옛날엔 화사을포라고 불렀다.

장안읍에 속하는 고리를 옛날에는 아이포라 하였는데, 기장현 상북면 아이포를 거쳐 화사을포가 되었다. 아이포는 작은 개 또는 작은 포구라는 뜻도 있는데, 옛 사람들은 작다는 말을 아이로 표현했고 한다, 이를 그대로 차음하여 아이로, 그리고 개또는 물가를 차훈하여 포라 하여 아이포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봉화대가 설치되면서부터 화사을포라 불리어졌고, 불을 사르다와 갯가를 합쳐지어진 화사을포가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 마을이름을 두글자로 불리어지는 것ㄹ이 통례임에 비추어 화포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통신수단의 발달로 봉화불이 없어지게 되자 화포라는 마을이름이 명분을 잃게 됨에 따라 새로운 고리(古里)로 이름지어졌다.

 

1969년에 한국전력 고리원자력발전소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건설되면서 주민없는 마을이 되어 이름만 남게 되었으며, 이 마을 이름이 화사을포, 화사포,들 불과 관계를 맺어 왔는데, 마침내 제3의불로 불리는 원전이 건설되었으니 , 옛 조상들이 지명에 대한 혜안을 다시 한번 더 느끼게 하고있다.

  

 

임을랑포일광면에서 나룻배르 타고 장안읍 임량리로 가던 나룻터인 임량진이 있었던 곳이며, 지금은 기장팔경중 하나인 임량해수욕장이 있어 바다의 풍광을 즐기는 곳이다.  장안읍 임랑리 해변에 있는 해수욕장이다. 예부터 월내해수욕장과 함께 임을랑포라 하였다.

 

* 임랑해수욕장 

임을랑포라는 지명은 주된 성책이 있는 갯가라는 뜻으로 임책(任柵)의 옛말이다. 차성팔경의 하나이다. 백설 같은 백사장이 1킬로 넘게 넓게 깔려 있고 남쪽에는 임랑천의 맑은 물이 백사장을 가로질러 바닷속에 잠긴다.백사장 주변은 노송이 큰 가지를 펴고 병풍처럼 푸른 숲을 이루고 있다. 근래에 관광객이 제법 붐비고 있지마는 아직은 호젓하고 조용한 곳이다.
 
예전 사람들은 이곳 임랑천의 맑은 물에서 낮에는 천렵을 하고 놀다가 병풍처럼 펼쳐진송림 위에 달이 떠오르면 님과 함께 조각배를 타고 달 구경을 하면서 뱃놀이를 즐겼다.동산에 달이 뜨고, 임랑천에 달이 있고, 천파만파 잔잔한 물결 속에 수천수만의 달이 잠기고,백사장에 달빛이 서리고 님의 얼굴이 달덩이 같고 내 마음이 달과 같다 하였다. 그래서 예부터 이곳의 월출경을 차성팔경의 하나로 손꼽는다.  

  정관 병산에서 발원한 좌광천이 동해바다와 만나는 곳인데, 임진왜란때 기장의 도자기 등을 싣고 갔던 곳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제철산업을 중흥시킨 박태준 전 국무총리의 생가가 있는 마을이며, 임진왜란때 축성한 임랑포왜성이 있고 물길 건너에는 임랑포 봉수가 있다.  

* 한때 미성을 자랑했던 가수 정훈희가 운영하는 카페 

        * 성철스님, 청담스님,서옹스님등 한국불교계를 이끌었던 유명 스님들이 수행했던 수행처 묘관음사 

 묘관음사는 근대에 들어와 향곡당 혜림스님께서 창건하셨으며. 이곳 묘관음사는 우리나라의 선맥을 이어온 혜월, 운봉, 향곡스님과 해운정사의 진제스님 그리고 성철큰스님께서 수행한 곳이라 더욱 유명해진 사찰입니다. 경내에는 전각, 대웅전,조사전,삼성각,종각이 있으며 당우는 길상선원,심원당,산호당, 법중대,금모대, 행로각과 각종편의 시설이 갖춰져 있으며 운봉,향곡,두분선사의 부도탑이 모셔져 있다.

성철스님께서 묘관음사에서 수행하실적에 스님의 출가전 따님이 기장 묘관음사에 아버지를 보러왔다. 

불필스님이 되기전 성철스님의 필요없는 딸 수경과의 첫만남  장소가 기장월래의 묘관음사였습니다.
성철스님은 출가하고 얼마 지나 세속에 떨치고 온 부인이 딸을 낳았다는 얘기를 풍문에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 따님이 바로 불필(不必) 스님이다. '필요 없는 딸' 이란 법명이다.  불필스님은 1937년 5월 아버지 이영주(성철스님의 속명) 와 어머니 이덕명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가한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수경(壽卿) 이었다. 지금은 그런 모습이 사라졌지만, 당시 고향 묵곡마을은 아름다운 경호강이 끼고 돌아 마치 강물에 둘러싸인 조용한 섬 같았다고 한다.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살수 있다고 할 만큼 넉넉한 집안이었기에 일제 식민지하에도 불구하고 수경의 유년시절은 남부럽지 않았다고 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를 처음 뵙기 전까지 수경에게 아버지란 그저 상상 속의 인물이었다. 불필스님은 "아버지가 스님이란 사실은 어려서 누군가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기에, 그저 동화 그림 속에서 나오는 사람인가 싶은 정도" 라 기억했다. 문제는 당시 낮았던 스님들의 사회적 위상이었다. 불필스님은 "보지도 못한 아버지인데, 스님이라는 게 싫었다" 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님의 딸" 이란 소리를 듣기 싫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과 함께 "아버지는 세상 등지고 가족도 버리고 산 속에서 무엇 하는 것인가" 하는 고민도 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어린 소녀는 아버지가 스님이란 사실을 감추고자 했으며, 속으로 감추면 감출수록 아버지와 불교에 대한 궁금증은 새록새록 피어났다. 조숙하고 총명했던 수경은 그렇게 아무도 모를 고민이 많았다.  

수경은 초등학교 4학년 때 할아버지에게 "사람은 나면 서울로 가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낸다" 는 옛말을 인용해가며 "서울 유학을 보내달라" 고 졸라 상경, 서울 혜화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 집안 살림이 넉넉했던 가문에서는 흔히 자식들을 서울로 유학을 보냈고, 이미 삼촌(성철스님의 동생) 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서울 초등학교의 수업은 시골 학교와 놀랄 정도로 차이가 컸다. 어린 나이로 서울 생활 적응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스님이란 사실은 아무도 몰랐기에 큰 짐을 벗은 것처럼 마음은 홀가분해 날아갈 것 같은 심정" 이었다고 한다.  

처음 아버지를 만나게 해준 사람은 묘엄(妙嚴.현 수원 봉녕사 승가대학장) 스님이었다. 묘엄스님은 성철스님과 절친한 청담(淸潭) 스님의 딸이다. 어느날 묘엄스님이 다른 비구니 스님과 함께 수경을 찾아왔다. "큰스님께서 경남 월래 묘관음사에 계시니 한번 가서 뵙도록 하자. "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에 얼떨떨해 있는데, 서울에 같이 유학와 있던 삼촌이 "담임선생님께 스님을 찾아간다고 허락을 받고 한번 가보자" 며 나섰다. "평생 불러보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아버지가 대체 어떤 모습일까" 하는 호기심 반(半) , 자식을 팽개친 아버지에 대한 미움 반(半) 에 "얼굴이라도 보자" 며 삼촌을 따라 나섰다.  

삼촌을 따라가면서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미워한 아버지인데, 그래도 찾아 나서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 이것도 천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기차를 타고 묘관음사에 도착하니 해질 무렵이었다. 산기슭을 따라 올라가니 누군지 모르는 무섭게 생긴 스님 한 분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스님이 바로 성철스님과 절친한 도반(道伴) 인 향곡(香谷) 스님이었다. 향곡스님이 말했다.  

"철수좌(성철스님) 가 오늘 이상한 손님이 온다더라면서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

수경은 몹시 기분이 나빴다. 친혈육인 자신을 그렇게 내팽개쳐 놓은 아버지, 그래서 원망스러웠던 아버지가 애써 찾아온 딸을 피해 사라지다니. 향곡스님이 뒤늦게 사실을 알고는 성철스님을 찾아 나섰다. 조금 기다리자 향곡스님이 다 떨어진 누더기에 부리부리하게 광채나는 큰 눈만 보이는 스님과 함께 나타났다. "저 분이 내 아버지인가" 하는 순간 눈 큰 스님이 소리를 질렀다.  

"가라,가!"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 있던 수경은 그 순간 "삼촌 돌아가요" 라며 돌아섰다. 그 때 무서운 얼굴의 향곡스님이 부드러운 미소로 붙잡았다. 자그마한 방으로 데려가선 과자며 과일이며 먹을 것을 내놓았다.  이렇게 성철스님과 딸 수경은 첫만남이 있었다., < 출처 :   ??  >

Posted by 혜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