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천의 Travelog


옛날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역적으로 몰아 귀양을 보내고
귀양을 가서도 귀양간 사람은 임금을 생각하고 북쪽을 보고
절까지하며 임금의 안위를 걱정하던 시대도 있었는데...

 사람이 달나라에 가는 세상이 되고 보니  세월이 바뀌어
요즘은  막대 놓고 막말해도 되는 좋은세상인것같다.

인공위성으로 달나라가는 세상에 나는 타임머시인을 타고
고려시대로 떠나본다. 고려 인종,의종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
가본다. 고려왕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의 부산동래
로 시간여행을 떠나보는 것입니다.

고려시대의 부산동래, 그곳으로 귀양와서 오이를심고 시를
 짓고  임금을 향해 북쪽으로 절을 했던  유명한 사람이 
계셨던 곳입니다.

 잘 모르는 분이 많을것입니다.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이 사람을 모르면 국문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일 것이지만 , 보통 사람들이야 고등학교때 국어 시간에 잠깐  배운것이 전부이니 잊고 말았을것이다.. 

정과정곡하면 모르실분이 많지만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다음 가사를 보시면 기억 나실겁니다. 

내가 임을 그리워하여 늘 울고 지내더니
저산접동새와 나는 비슷합니다
참소의 말이 (참)이 아니며 거짓인 줄을
지새는 달과 새벽별이 아실 것입니다
죽은 영혼이라도 임과는 한 곳에 가고 있습니다
(임의 뜻을) 어기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저는)과실도 허물도 없습니다
(죄를 저에게 씌운 것은) 뭇사람의 참소하는 말입니다
사라지고 싶구나
임이 저를 (다시 부르시겠다더니) 벌써 잊으셨습니까
마소서 임이시여 돌려 들으시어 다시 사랑하소서

 이 글을 보시면 아 ∼ 그  글 기억 나구만 하실겁니다.

오늘 정과정곡을 지은 정서의 유배지 동래 망미동을 다녀 왔습니다.
 

정과정곡 (정서 가요)  [鄭瓜亭曲] 고려시대 정서(鄭敍)가 지은 고려가요 
                                                      
고려가요 중 작자가 분명하게 밝혀진 유일한 노래로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이다.
<고려사〉 권71 악지(樂志) 2에 노래의 제작동기와 이제현의 한역시가 전한다. 가사는 〈악학궤범〉 권5의 〈학연화대처용무합설 〉조에는 '삼진작'(三眞勺)이라는 명칭으로, 〈대악후보 〉에는 진작 1·2·3이라는 명칭으로 실려 있다. 그밖에 정과정가·과정곡·과정계면곡이라고도 부른다.

정서가 인종의 총애를 받다가 의종이 즉위하자 동래로 유배를 당했다. 왕은 그를 보내면서 "지금 가 있으면 오래지 않아 조정의 의론이 있어 마땅히 소환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적소(謫所)에 오래 머물렀는데도 왕의 부름이 없었다. 정서는 자신의 심정을 하소연하기 위해 거문고를 타며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따라서 창작시기는 정서가 동래에 귀양 가 있었던 1151(의종 5)~57년일 것으로 추정된다.[출처: 브리태니커]


악학궤범〉에 의하면 삼진작이 연주되면 기생이 이 가사를 창했다고 한다. 악곡상 삼진작이 연주될 때 그 가사로 〈정과정곡〉이 얹혀지므로 〈정과정곡〉을 삼진작이라고 통용해 부른다. 따라서 진작은 음악적 명칭이고 〈정과정곡〉은 문학적 명칭이 된다.

삼진작에서의 3과 진작 1·2·3에서의 1·2·3은 성음(聲音)의 완급(緩急) 정도를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형식은 음악적 분절 면에서 보면 3개의 강(腔)과 8개의 엽(葉)으로 이루어진 11구이며, 내용적 분절 면에서 보면 10구이다. 10구라는 점에서 10구체 향가의 잔존 형태로 보고 있다. 향가의 10구체에서는 '아야' 등의 감탄사가 제9구 처음에 등장하는데 이 노래에서는 제10구 처음에 '아소 님하'로 등장한다. 이것은 시가의 종결 서두에 감탄사를 두는 우리 시가 전반의 경향과 일치하는 형식적 특징이다.

 
"내님믈 그리와 우니다니/산(山)졉동새 난 이슷요이다"에서는 님을 그리며 우는 자신의 모습이 접동새와 비슷하다고 했다.
 
"아니시며 거츠르신 아으/잔월효성(殘月曉星)이 아시리이다"에서는 님이 나를 아니[非]라 하시며, 거짓이라 하여도 그렇지 않은 것을 잔월효성이 알 것이라고 했다.
 
"넉시라도 님은  녀져라 아으/벼기더시니 뉘러시니잇가"에서는 넋이라도 님과 함께 있고 싶으나 자신의 충정을 믿지 못하고 우기시던 사람[벼기더시니]은 곧 님이었다고 원망의 감정을 표현했다.
 
"과(過)도 허믈도 천만(千萬) 업소이다/힛 마러신뎌/살읏븐뎌 아으"에서 후 2구의 해석은 구구하다. "힛 마러신뎌"는 '묻 참언(讒言), 멀리 말으시오, 말씀 헛 말으소서, 말짱한 말이었구나(거짓말이었구나)' 등의 해석이 있으며, "살읏븐뎌"는 '아뢰옵나이다, 슬프구나, 사라지고 싶습니다' 등의 해석이 있다.
 
"니미 나 하마 니시니잇가/아소 님하 도람 드르샤 괴오쇼셔"에서는 님이 나를 잊으실 리 없음을 강조한 후 직설적으로 님의 사랑을 바란다고 노래했다.

충신연주지사의 대표적 노래로서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널리 불려졌다. 형식면에서 향가와 시조·가사를 이어준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고 합니다.


흐르는 세월은 무상하다고 했던가. 여기는 고려 의종때 과정(瓜亭) 정서(鄭敍)가 유배되어 노닐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그러나 현대인의 편의를 위해 옛모습을 버꾸어 놓았습니다. 과정도 없어지고 오이밭도 없어지고, 그분이 건너던 오옹건내도 과정천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수영강변2차  e-좋은편한세상등의 아파트촌으로 변모하고 요배지는 큰길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 끝트머리 요배지를 정화하여 과정공원이라고 만들어져있으니 다행입니다.

사람들이 산책하던 경암(鏡巖)은 자리를 옮겨 옛모습대로 보존하고 과정은 정자를 새로 지어 정과정(鄭瓜亭)이라 현판이 달려있습니다. 낮이면 오이심고, 밤이면 거문고 가락에 시름을 달래시던 그때의 모습은 아니라도 옛흔적이 남아있어 다행입니다.  



정서가 귀양에 연루된 사연은? 
정과정의 작자 정서(鄭敍)는 호가 과정(瓜亭)이다.j정서는 상국공(相國公)의 사위가 되었고, 그의 처형은 인종의 비로 공예태후(恭睿太后)가 되었으며, 태후의 아들 가운데는 장남이 인종, 3남이 명종, 5남이 신종이 되었다. 따라서 인종은 정서와는 동서간이며, 의종, 명종, 신종 등의 이모부가 된다.7)그러나 그는 의종 5년(1511)에 대령후(大寧侯)와 사귀어 그 집에서 놀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그 해 5월 25일에 동래로 귀양 가게 되었다. 그 뒤 그는 의종의 몇 차례의 사면8)에도 풀려나지 못하다가, 의종 25년 8월에 정중부(鄭仲夫)의 쿠데타에 의하여 의종이 밀려나고, 명종이 즉위한 해 10월에 대사령(大赦令)이 내려지고 나서야 20여 년간의 귀양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처럼 명문가 출신이자 왕실의 외척이며, 의종의 이모부였던 정서가 20여 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해야만 했던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인종은 5남 4녀를 두었고, 장자인 의종을 태자로 삼았으나, 차자인 대령후가 덕망이 있고 도량이 넓어 인종과 왕비(공예태후)는 그를 태자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태자시강으로 있던 정습명이 극간하여 의종이 보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형제간에 시기가 많았다고 한다. 의종에게 아우인 대령후의 존재는 매우 불만스럽고 거추장스러운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 정서가 대령후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보고 조정 논의를 핑계 삼아 그를 귀양 보낸 것이다.9) 따라서 “머지않아 소환하게 될 것이다.”던 의종의 언질은 이모부인 정서의 서운함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궁색스런 빈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의종이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려고 했거나, 정서를 구해주려는 의지가 있었고 공예 태후의 존재를 염두에 두었다면, 2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귀양지에 보내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서는 대령후와의 관계 때문에 희생된 인물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정서는 그의 노래에서 “過도 허물도 千萬 없소이다”라고 변명하며 억울해 하고 있다. 정서의 입장에서는 모반을 괴한 일도 없으니 당연한 말이나, 당시의 정국을 그가 너무 쉽게 생각하여 사려 없이 순진하게 대한 데에도 원인이 있고, 보다 근원적으로 “성질이 경박하고 재예(才藝)가 있었다”는 진중치 못한 그의 인물 됨됨이에 원인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정서가 순전히 정치적 희생물이 된 것은 사실이나 그렇게 되기까지의 속사정을 살펴보면 유배 원인을 의종이나 그 추종 세력의 참언에만 돌릴 수 없는 복잡한 사연이 있는 것이다.

                                                              
                                          정과정 팔각정에 걸려있는 글

                    높이12M , 둘레4M , 400년된 팽나무가 경암(鏡巖 )과 함께있다. 

                                      정과정에 올라 내려다본 수영천

여행정보
1. 위치 : 부산시 수영구 망미동 산7-2번지
2. 전화 : 수영관광안내소 051-610-4216
3. 찾아가는길 
    부산 수영강변 수영강변2차 e-편한세상아파트 앞 
     버스115-1번 코스트코/ e-편한새상아파트 하차 100m 지점 
Posted by 혜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