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천의 Travelog

건천 IC에서 경주~영천 간 4번국도 를 이용 달리다가 아하교차로에서 고경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심곡저수지이다.

심곡저수지 따라 운전하다 보면 경주시 서면 도리마을이다. 노란인행잎 이 비바람에 조금 빨리 떨어져 조금은 늦게 찾은 것이 후회되었지만 아름다움이란 노란색에서 만 찾으려는 아집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느꼈다.

노란색 아집을 버리니 기다란 큰키은행나무숲이 연출하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낄수 있었다.

Posted by 혜 천
배리삼존불이 계시는 삼불사에서 출발 하여 삼릉을 거쳐 금오산 정상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쓴 용잠골 용장사지터를 거져 4시간 동안 역사기행을 했다.

Posted by 혜 천

 

토함산 석굴암,  제2석굴암 군위삼존석불 , 군위 삼존석불, 모전석탑

경주 토함산  석굴암은 수학 여행으로 인연을 맺어 몇번을 다녀온 일이 있지만  팔공산에 위치한 제3석굴 군위 삼존석불에 대한 여행은 처음이다.  팔공산하면 대구에 있고 그 산의 정상에  부산 사람들이 즐겨 찾는 동화사 갓바위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팔공산은 대구 동구 용수동과 
경북 영천 그리고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세 지역이 경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팔공산  비로봉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는 군위 부계면 남산리 쪽 에서 거대한 바위산  절벽을 이루었고 이 절벽허리 20m 높이에 남쪽으로 향한 둥근 천연동굴에 삼존불상을 봉안 하였으니 삼존석불이다.

  

군위 석굴암 삼존불

군위 석굴암 삼존불


이 삼존 석불(국보제109호) 은 제2 석굴암이라는 이름 때문에 경주 토함산 석굴암보다 뒤에 축조된 느낌을 주지만
  실제로 경주 토함산 석굴암보다 약 100년정도 먼저 만들어 졌다고 한다.  거대한 절벽 바위벽 동굴에 대세지보살. 아미타불 , 관세음보살 삼존불이 봉안되어있는 모습은 신기하기만 하다

 

군위석굴암 조감도

군위삼존불 석굴암 조감도


깍아지른 절벽위에 세워져 수백년동안 울창한 숲으로  덮여있고 가려있어 그누구도 몰랐기에 
왜정 36년동안 일본놈들의 문화재 반출에 온전히 본존되어 지금 우리가 볼수있게 된것이라고 한다. 


군위 석굴암 삼존불 #2

군위 석굴암의 삼존불


이 석불은 1550년 전에 아도화상께서 수도전법하시던 곳이며 ,그후 원효대사께서 아미타불을   조성 봉안하시고 해동제일의 석굴사원으로 신라불교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한다

군위석굴암 모전석탑

군위 석굴암 삼존불 아래 모전석탑


삼존석불 모전석탑은 단층 기단위에 단층의 탑신부를 형성한 특이한 형태로서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탑신부는 근세에 다시 축조되어 원형에서 변형되었으나 탑신을 유지하고 있는 귀중한 유산이다.


군위 석굴암 항마지촉 아미타불

군위 석굴암 사찰입구 항마지촉 아니타불


                     항마촉지임을 하고 계시는 아미타불




                      비나불을 모시는 비로전


군위석굴암 양산서원

군위석굴암 뒤편에 위치한 양산서원


양산서원 은
  1786년 정조10년 지방교육기관이며 성현을 존숭하던 서원  부림홍씨 세거지로서 선대 조상들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고 홍여하선생이 수찬한 휘찬려사(고려사)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군위 삼존석굴 주변 관광안내도

군위 삼존석불 주변 관광안내도

 

Posted by 혜 천

 

부산에서 군위까지  한번가기가  쉽지 않는 먼길이다.  군위는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인각사, 삼존불, 한밭마을등 좋은 곳이 많다, 그중에  군위를 삼국유사의 고장이라고 부르니 군위들리면 삼국유사를 집필한 인각사를 꼭 보고 와야 군위구경을 했다고 할수있다네요. 

왜 그러냐 하면 바람흔적이 살고있는  ,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삼국유사 1권이 보관, 전시되고 있어 구경 한적이 있었다. 그때 보며 언젠가는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군위 인각사를 가 봐야지 하다가  여행길에 방문했다.  서울 이외 삼국유사를 보유하고 있는 유일한 불교사찰인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그 귀한 책을 생각하며 ~  

 삼국유사는 소설의 흐름을 가늠해보는 설화, 고대시가 ,향가, 와 고대민중이 불렀던 민요, 고대신화 . 그리고 일연스님이 쓴 48편의 찬가가 있다. 이로 볼때 일연스님의 뛰어난 문학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주옥같은 작품들이기도 하다고들 한다.  

삼국유사의 구성은

상권1, 2권으로 하권이 3,4,5권으로 구성되어 총 5권으로 구성되어있다

 *  왕력 (王曆)제1 - 신라,고구려,백제,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의 역대왕의 출생과 치세에 대해

                            기술하고 고조선부터 삼한  부여,고구려, 통일이전 신라등 여러나라의 흥망성쇠,

                             신화,전설과 함께 기록

*  기이(紀異)  제2 - 문무왕부터 경순왕까지 신라 ,백제,후백제에 관련된 이야기

*  흥법(興法)  제3 - 불교의 전래 과정수용,불교의 융성과 고승들의 행적 기록

*  탑상( 塔像)제4 -  탑과 불상 및 사찰의 유래 이야기

*  의해(義解) 제5  - 원공을 비롯한 신라의 튀어난 학승과율사들의 전기

*  신주(神呪) 제6 - 밀교,신승들의 이적(異蹟)에 관한 이야기

*  감통(感通) 제7 -  신앙의 감흥 과 영험에 관한 이야기

*  피은(避隱) 제8 - 세상을 피하여 은거하던 승려들의 아름다운자취

*  효선(孝善) 제9 - 불교적인 선행과 효도에 따른 보답이야기      

 

 

범어사 성보박물관 소장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 고승 일연이 충렬왕 7년(1281)에 편찬한 역사서로 5권 목판본이다. 1310년대에 그의 제자 무극이 간행하였지만 이것이 처음 간행한 것인지, 그 후 다신 간행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조선 전기 중종조 간행본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석남본과 송은본이 현존한다보물 제419호로 지정된 것은 송은본으로 3,4,5권만 있는데 이중에서도 권3의 6장까지와 권5의 끝부분 4장이 없는 상태이다. 이 책은 권4와 5로 서문과 발문이 없으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완질본과 동일한 판본으로 추정되며, 규장각 소장본 발문의 기록으로 보아 중종 7년(1512)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는 신화와 설화의 보고이며, 한국 고대어를 연구하는데 있어서도 귀한 자료가 된다. 이 책은 역사고고학의 대상이 되는 유물과 유적을 조사, 연구하는데에도 기본적인 자료가 되며, 한국고대미술의 주류인 불교미술을 연구하는데에도 가장 오래된 중요문헌으로 손꼽힌다. 또한 이 책에 실린 향가는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 가운데 최대로 꼽히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 출판되었다는 점, 전해오는 간행본 중 몇 종 안되는 귀중본이란는 점 등으로 볼 때 서지학적인 중요성뿐만 아니라 문화재적 가치도 매우 높다고 평가된다.

해제사유: 보물 제419-3호 삼국유사<권4-5> 로 승격지정됨에 따라 해제됨

 

보각국사 일연스님은 왜 삼국유사를 섰는가 ?

삼국유사의 글머리에 그 이유를 밝히고 있었다. 글 첫머리에 " 대체로 옛성현들이 예악(禮樂)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仁義)로 가르침을 베풀려하면 괴이,완력,패란,귀신에 데해서는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알때부터 부명(符命)을 받고 도록(圖錄)을 받는것이 반드시 보통사람들과  는 다른점이 있어  천자의 지위를 장악하고 대업을 이룰수 있다. -중략-  그러므로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럽고 기이한데서 나온것이 어찌 기이하다고 하겠는가?   

당시 지배층이 우리나라의 시작을 기자조선에 두려하는데 반해 일연스님은 삼국유사  첫머리에 단군신화를 기술하여 국가의 위상을 중국과 나란히 두었다.  단군의 치세를 중국의 전설적인 성군 요임금과 동시로 처리하고 단군을 천제의 아들로 설정하고 있어 우리 역사와 문화가 중국에 뒤지지 않았다느 자주적 민족사관을 펼다.  이런점으로 미루어 일연스님은 우리민족이 몽고 침입으로 굴욕당하고 있는 시기에 민족 자주의식을 깨우치고 후대에 민족혼을 심어 주기위해 삼국유사를 편찬한것으로 보면될것이다. 

 일연 스님의 속성은 김, 이름 견명, 처음자는 회연, 일연은 자중의 자, 호 무극.목암, 시호 보각. 경상 북도 경산 출생. 1214년(고종 1) 9세에 해양(전라남도 광주) 무량사에서 도를 닦고, 1219년 14세 때 승려가 되어 전국의 이름날 절을 찾아다니며 공부하여 20세에 선불장에(승려의 과거 시험)에 장원 급제하였다. 1237년(고종 94)년 선사, 1259년 대선사가 되었다. 

 한편 몽고의 횡포가 극심하던 당시, 백성들에게 불법을 펴서 민심을 가라앉히기에 힘썼다. 또, 대구 팔공산 부인사의 '대장경'이 불타자, 현종의 명을 받아 새로 발간 하였다. 일생을 통하여 100여 권의 책을 지었는데, 그 중에서도 '삼국유사'가 특히 유명하다.  

일연선사는 1206년 지금의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14세에 설악산 진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22세인 1227년 승과에 급제한 뒤 비슬산 무주암과 묘문암에서 수도하셨다. 44세인 1249년에는 남해의 정림사와 지리산 길상암에, 1264년에는 영일 오어사에 계시다가 대구 가까운 인흥사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 학승들이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72세인 1277년에는 청도 운문사에 주석하시다가 충렬왕에 의해 국존에 추대되었고, 이곳에서 삼국유사의 집필을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1284년에 인각사로 와서 구산문도회를 연 뒤 1289년 이곳에서 입적하셨다.  

5년 후 14세 때에 삭발하고 중이 되어 선종에 속하는 여러 절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수학, 설법하는 동안에 그의 편판은 날로 높아져서 사람들이 조계종의 4선인 가운데 첫째로 추대하였다. 고종 14년 겨울에 승과에 나가서 장원으로 급ㅔ하였는데 이때 나이 22세였다. 이후 그는 여러 절을 두루 거치며 수도 생활을 하였고, 그 깨달음의 폭과 깊이를 더해 가다. 그가 주관하는 법회에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그의 설법을 듣고 감동을 받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삼중대사, 대선사 등에 올랐으며 1283년에 국사가 되었다.
충렬왕 15년 6월에 병을 얻어 회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손수 왕에게 올릴글을 쓰고 여러 스님들과 함께 무답으로 날을 보냈는데 이 날 밤에 둘레가 한 자가 넘는 큰 별이 절에 떨어졌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여러 사람들에게 오늘 떠나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몇몇 중과 사 에 대한 문답을 한 후 자는 듯이 돌아가셨다. 이때 오색의 빛이 절 뒤에서 일어나 타오르는 듯 했고 그 뒤에 는 흰구름이 덮여서 하늘을 향하여 가버렸다고 한다. 그의 나이 84세의 일이다.  

일연을 사람됨이 과묵하여 허튼 말을 하지 않았고 모든 일에 가식없이 진정으로 대했으며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학문하는데 있어서도 특별한 스승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덕을 닦으며 수양하였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쇼성도 지극하여 항상 곁에 머무르기를 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론 불교적인 업적과 바앧한 저서이다. 일연이 쓴 책은 모두 100여권이나 된다고 하니 가히 그 정력과 박식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그와 관련있는 불교서적은 전하는 것이 없고, '삼국유사'만이 남아서 국문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삼국유사는 고루려, 백제 , 신라등 삼국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며 그가 살던 고여 중엽가지의 역사적 사실에 관해서도 언급되어있다. 그 중 가장 중시되는 내용은 신라시대의 향가14수이다. 여기에 실린 향가는 그 내용에 있어 제각기 다른 특색을 갖고 있다. 향가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의 설화, 신화 등 역사적 야사도 실려 있다.


 

인각사는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화산에 위치해 있는 사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은해사 말사로서 신라선덕왕 11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절입구에 깍아지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기린이 뿔을 바위에 얹었가도 하여 절 이름을 인각사(麟角寺) 라 하였다고 한다.  고려 충렬왕 때 일연스님이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이곳에 거처하면서 구산문도회를 두번이나 개최하였고 ,여기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고 한다.

 

 인각사 보각국사 탑 (보물제428호)은 고려 충렬왕 15년 (1289년)에 입적한 보각국사 일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부도탑이다. 일연은 노년에 인각사 에서 부모를 봉양하며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는데 아침에 해가뜨면 이 탑에서 광채가 나와 노모의 묘를 비추었다고 한다

 

계례의의 혼을 되살린 천년고찰 인각사의  국사전이 있는 인각사지는 사적제374홀로 지정되어 발굴 ,복원중인 곳이다. 신라선덕여왕 11년(642년)에 의상대사 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보각국사 일연스님이 고려 충렬왕10년 (1284년)부터 임종때까지 5년동안 이곳에서 삼국유사 를 비롯하여 100여권의 불교서적을 집필하였고 총림법회등 대규모 불교행사를 연 곳으로 유명하다.

 

 

군위 인각사 국사전 뒤편 비각 속에 일연스님의 비가 모셔져 있다. 보각국사정조지탑과 함께 보물 제428호로 지정된 유물들을 둘러보는 여행을 했다. 비석의재질은 점암판이며,지금 비록 깨어져 본모습을 짐작키 힘들지만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라 멀리 중국과 일본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다.

 

스님이 입적한지 6년 만인 충렬왕 21년에 세워져는데, 당대의 문장가 민지가 글짓고 ,글씨는 일연스님의 제자인 죽허가 칙명을 받고 명필 왕희지의 행서를 모았고, 또 다른 제자 청진이 세웠다고 한다.

 

비의 앞면에는 일연스님의 행적과 추모의 정을 담았고, 뒷편의 음기에는 비를 세운 경위와 다비식 때의 영험담과 더불어 일연스님 문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인각사 출토유물 전시회가 열리고있는 곳을 구경하며 일연스님과 인각사에 대해 배울수있는시간이 되었다.

 

 뚜껑이 7층 탑모양으로 장식된탑형 향합으로 청동향합이다, 향합은 병향로와 향합은 본래 한세트로 중국 서진대에 개착된 병녕사 169굴릐 벽화에는 병향로와탑형 합이 같이 출토되었다. 그래서 인각사 출토향합도 병향로와 한세트라 할수있다.  

청동정병으로 1점은 완형이고, 다른 것은 목 부분이 일부 파손됐다.타원형 몸체 어깨 부위에 작은 뚜껑을 여닫을 수있는 주구와 몸체 상단에 가늘고 긴 목인 침대를 달았다. 정변은 주전자의 일종이다. 불상을 목욕 싵키는 욕불과 같은 불교의 중요한 의식에 사용되는 깨끗하고 성스런 물을  따르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정병(淨甁)이라 부른다

 

 

 

 

 

 

청동반자이다. 청동반자란 간단히 말해 북이다.
청동반자는 각종 불교의식에서 사용한다, 앞면에는 세줄 융기 동심원을 둘렸으며 그 중앙인 당좌 에는 연꽃무늬를 돋을 새김했다.

 

 

 청동그릇이다.인각사에서 3점의 청동그릇이 발견되었는데 이중에서 완형으로 남아 있는 것이 1점이다.  

  

여행정보

1> 찾아가는길

  * 승용차 : 대구 - 팔공산순환도로  - 한티재휴게소 - 부계남산리 - 신성면 - 갑티재 -고로면화북리 인각사

 * 버스  : 대구(북부주차장) - 군위우보면 - 고로면 - 인각사   (75분소요, 배차 8분간격)

 * 고속도로 : 중앙고속도로 _ 군위ic - 효령면 -부계면 - 고로면 - 인각사

2> 문의 :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612번지  인각사

      전화 : 054- 384  -1161 

Posted by 혜 천

                           
경주의 동쪽  감포 바닷가에 위치한 통일삼국시대의 사찰터 - 감은사지는 제일 좋아하는 신라탑이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이 새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틈 만나면  동해로 처들어오는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세운 절이다.

문무대왕 생전에 절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받아 즉위  이듬해 682년 완성한 사찰 로 지금은 삼층석탑이 웅장하게 서있다. 아버지는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켔다는 생각이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는 아들의 마음을 잘 읽을수있는 사찰이였을 것이다.  죽은 아비가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며 힘들때 쉴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 중 효자 아들이라 새악 되기도 한다.

감은사지 삼층 석탑을 보며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아버지께 효도 하는 효자의 마음을 배울수 있어 좋은 곳이라 자주 찾아 가는유적지 이기도 한 곳이다.            

                       감은 사지 넓은 뜰에 나란히 서있는 쌍탑, 국보 112호 감은사지 3층석탑 

감은사의 흔적으로 볼때 바닷물이 금당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서로 같은 크기의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으며 삼국통일 직후 쌍탑으로가는 

                                                     최초의 석탑 배치라고 한다.                            

                  

           2단의 기단 위에 올린 3층 탑신  

                          금당터로 돌 밑으로 바닷물이 들어 왔다. 이는 문무대왕이 용이되어 왜구를 물리치고

                               그리고 사찰 까지 들어 올수 있게 아들 신문왕이  들었다                        

                  서탑과 금당터        

감은사가 있었던 흔적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부분들이 통돌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수십개의

부분석재로 조립되어있다는 것이다. 탑을 세운 시기는 신문왕 2년으로

1960년 탑을 해체 수리할때 청동제사리 (보물366-1호)와 청동제사각함 (

보물366-2호)이 발견되었으며, 경주 분황사를 제외하고 

 탑의 전체 높이가 13.4m경주에 있는 석탑중 가장 거대한 탑이기도 하다.

 

여행정보

* 위치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3

* 전화 : 054-779-6369        

Posted by 혜 천

학교시절 역사 시간에 개괄적으로 배우면서 무조건 외워야되는 서원이름들 ,   안동의  도산서원 풍기의 백운동서원, 소수서원 이렇게 줄줄 외워야 시험에 점수를 잘 딸수있었던 시절이 생각났다. 그런후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풍기 소수서원은 이번이 처음이니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늦게나마 찾아왔으니 꼼꼼시리 보고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두루 살펴본다.

소수서원으로 들어서자 절의 위치를 알리는 당간지주가 나타난다. 당간지주는 절에 불교의식이나 행사가 있을때 당이라는 깃발을 높이 다는 것인데 이상하다 생각되었다.그런데 이곳이 통일신라시대 세워진 숙수사라는 절이있던 곳으로 숙수사 당간지주(보물제59호) 로 세조3년 단종복위 운동의 실패로 이곳 순흥지방이 큰피해를 입었는데 그영향으로 폐사 되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다 

 

                    취한대

 

세조 3년 단종복위 운동의 실패로 금성대군을 위시해서 순흥지방 주민의 처형으로 그 피가 이곳까지  흘러내려와서 그 원혼의 울음소리를 달래려고 주세봉이 부임하여  붉은 글씨로 경자를 쓰고 제사를 지내주자  원혼들의 울음소리가 조용해졌다고 한곳   

          숙수사지 당간지주와 출토된 유물들

 

 백운동 서원에서 소수서원으로

조선시대 1542년 중종37년 풍기군수 주세봉이 안향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고 1543년 중종38년 유생들 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을 세웠다.그호 1549년 명종3년 퇴계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경상감사 심통원에게 계청하자 1550년 왕명으로 대제학 신광한이 서원 이름을 旣廢之學 紹而修之 ( 기폐지학 소이수지 =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한다) 에서 < 紹修 > 라 지었으며 명종 임금이 직접 < 소수서원 紹修書院> 편액을 써서 하사 하였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 서원이다.

                                         국보 111 호 안향 영정                                                                                       

 안향 (1243-1306년) 처음 이름은 유(裕) 이며 호는 회헌,본관은 순흥, 시호는 문성공 , 밀직부사 부(孚)의 아들이며, 순흥의 평리촌학교에는  그의 태실지와 벼루를 씻은 세연지와 우물이 남아 있다.

1260년(원종1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1288년 고려 유학제거가 되어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와 공자,주자의 화상을 가지고 돌아와서 주자학을 연구하었다.

1303년 에는 국하학정 김문정을 중국 강남에 보내어 공자와72 제자의 화상,문묘에 사용할 제기,악기와 육경,제자,사서,주자서등을 구해오게 하는 한편 양현고를 세워 장학사업을 펴고 섬학전을 마련하여 인재양성에 힘쓴 유학자. 그는 주자학을 전래 발전시킨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서 충숙왕때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주세봉은 안향을 동방도학의 시조로 사문에 막대한 공을 남긴 선현이라추앙하였다.

  

     보물  717 호 주세봉 영정

 

주세봉 (1495-1554년)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호는 신재,본관은 상주, 시호는 문민공이다.152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교리,예빈시정을 거쳐 풍기군수로 재임중 1542년 순흥 선호동의 숙수사지에 안향의 사당을 건립하고 이듬해에는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당시 산삼공납의 민폐를 덜어주기 위히여 가삼재배의 주산지가 되었다. 즉 풍기인삼이되었다..

  

 

 

                             탁영지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겸암 류운용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할때 연못을 파고 대를 쌓았던 곳.

                     소수서원이 안동의 도산서원보다야 크겠는가 한생각이  잘못되어도 많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실감한 곳이었다. 소수서원 자체만 들러보아도 몇시간이 걸릴것 같으며 사료관, 소수박물관
                 그리고 이곳 선비촌을 둘러볼려면 하루를 잡아야  제대로 볼수있는 역사깊은 곳이라 생각되었다
.   

소수서원 
위치: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2-8
    전화 : 054 -639-7691



Posted by 혜 천

      
       부산에서 적당히 멀리 떨어진 청도여행!
       부산에서 서울산 IC를 거쳐 가지산 고개를 넘어 운문호반
       으로 접어드니 
운문호반에 비친 가을 단풍이 그 야말로
       아름답고 길거리 양쪽에
  빨갛게 주렁주렁 익어가는
       청도 감이 어린애의 마음을 만들며  동곡을 거쳐
       도착한 곳이 청도 금천 신지리  운강 고택이다.    

       청도는 변한 12국중 우유국의 위치가 청도라 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청도라는 이름으로 유지되었으며
       옛이름은 이서, 대성, 도주, 오산이있다고 한다, 
      청도 (淸道)라 함은 산수가 맑고 아름다우며 큰길이
      사방으로 나 편하다는 뜻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청도의 고택 운강고택에 먼저 도착해 옛청도 선비며 양반들  삶의 흔적을 보았다.

            운강고택은중요민속자료 제106호로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위치하며                           
           소요당 박하담 (1479-1560년)이 벼슬을 사양하고 이곳에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던 터에 
           1809년 박정주가 분가하면서 살림집으로 건립하고 1824년  운강 박시묵이 중건한 고택이다. 

 

 이어서 가까이있는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에 위치한경북 유형 문화재 제79호 선암서원  
 으로 향했다.
소요당 박하담과 삼족당 김대유를 배향한 서원이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때 
 없어진 것 을 1878년 소요당의 
후손들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는 서원이다.

 

                     청도 석빙고 (보물 323호: 경북청도군 화양읍 동천리)로 간다. 

 

조선 숙종39년 (1713년)에 축조 현재 전국에 6개의 빙장시설인 석빙고가 남아 있다. 길이 14.75m. 폭 5m의 장방형  구조인데 중앙에 배수국가 있어 경사를따라 물이 외부로 배출되게 되어있다.  경주 석빙고 달음으로 큰 규모의  석빙고이며   주변에 선정비, 화양향교,화양읍성의 볼꺼리가 있다. 

 옛날에는 냉장고도 없었으니 어찌 여름을 지냈을까? 하는 생각이 많았는데 이곳 석빙고에서 그해답을 찾게 되었다. 우리나라 선조들은 벌써 신라 지증왕 6년에 왕이 유사에게  얼음 창고를 만들라고 했다니  그 기원이 참으로 오래 되었다고 볼수있다

         전국에 6개의 석빙고가 있으며 가장큰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에있는 경주 석빙고이며, 창녕,안동,창영영산 현풍,그리고 가장오래된 청고 석빙고가 있다.   이 청도 석빙고는 신라지증왕6년 진사 박상고가 1713년2월에 착공  5월에 준공한 것인데 당초 북문밖에 있던이 허물어져 이곳에 복원하였단다

  보물 제 323호인 이 석빙고는 조선시대 겨울에 자연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봄,여름에 사용하기 위한 얼음 저장고였다. 석빙고의 입구 좌측에는 숙종 39년 (1713)에 세운 비가 있어 축조연대 및 인력과 공정기간등을 알수있다.  빙실 바닥은 길이 14.75 m 폭5m의 장방형 구조인데 내부 계단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경사졌고 중앙에는  배수구가 있어 경사를 따라 물이 외부로 배출되게 되어 있다. 다듬은 돌로 윗부분을 반원형인 홍예로 틀어 올리고 잡석으로 벽을 쌓았다. 현재 전국적으로 6기의 석빙고가 국가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이것이 가장 오래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트갤러리 청담에서 차한잔 하며 쉬어 가자 ! 

대구 수성 못에서 청도 방향 20분 거리의 청도  유등연지 내에 위치하며
100여평의 대지위에 전시실과 아트샵 쉼터가 있어 진한 커피 한잔 하며 쉬어 갈수있는 운치 있는 좋은 곳이다. 

 2층 커피 숍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아늑함을  주는 수준 높은 공간이다.           

 경북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 31 번지  연락처 054-371-2111 / 016-9772-1123 

 

  

 

경북 청도군 화양읍송금리에 있는 감 와인터널을 구경 않고 지날수는 없는 일 !!!
감 와인 터널은 1896년 착공 1904 완공 길이 1,015m  폭4.5m 높이 5.3m 의 터널이다.l

 

와인 터널은 1905년에 개통된 옛 경부선 열차 터널을 정비하여 2006년 3월에 개장하면서 와인터널로 명명하여 현재 와인 숙성창고로 활용하고 있는 곳이다.

이 터널은 15℃온도와 60-70% 습도가 연중 일정하게 유지되고 다량의 음이온이 어우러진 와인 숙성의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와인터널은 감와인의 숙성고,시음장,전시,판매장 그리고 다양한 이벤트를 하는 관광지인것 같다.

 이 터널은 높은 산중턱에 건설되었으며,이 고개를 오르기 위해서는 기관차 으로 힘겹게 견인해야 했으며

1937년도에 현재의 남성현 터널이 개통되면서 폐쇄, 이후 6.25때는 각종 군수물자 수송로롤, 1960년대 말까지는 버스등이 통과하는 국도로 사용되던 곳이다. 토널 천정에는 증기기관차가 숨가쁘게 내뿜었던 매연이 고스란히  묻어 있어 100년전 시간여행을 가는 아련한 옛추억을 회상 할수있는 곳이기도 하다  

                                    * 감으로 만든 세계최초의 와인 감그린 한잔 

           감그린은 최고의 품질을 인정 받아 2005년 APEC 정상회담 대표단 공식 만찬주로 선정되어 사용되어 졌다고 한다 

 

대적사의 극락전 반야용선 타고 서방정토 가는 거북을 보자 
많은 사찰 을 다녀 봤지만 이렇게 적막하고 고즈녁하게 자리 잡고있는 사찰을 본적이 없다.   대적사 극락전은 소박하고 단출한 절이다. 그 산사 올라가는 길 초입엔 청도를 나타내는 감나무엔 빨간  감이 주렁 주렁 달려 있고 청도 감 와인 터널이 있다 조금더 오르니 단풍잎이 떨어지는 오솔길이 가을 정취 를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대적사 극락전은  보물 제 836호 지정되어있으며  경북 청도군 화양읍 송금리 256번지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대적사는 동학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절로  적적하다 못해 통빈 것 같은 허허롭고 고즈녁한 사찰이다.

 

신라 헌강왕 2년에 보조선사가 토굴로 창건하였으 며 고려초 보양이 중창하였다. 임진왜란때 ㅍ허가 된 사찰을 1635년 초옥3칸 암사를 짖고 대적사라 하였으며  1689년 숙종13년 성혜대사가 중수하여 삼존불을 모시고 다시 사찰의 면모르 갖추었다.

 

경내 건축물중 18세기경 건립된것으로 추정되는 극락전은 정면3칸 측면2칸으 다포계 공포를 갖춘 맞배지붕이며 1984년 보물제836호로 지정되었다. 기단의 조각은 용,거북,게등과 전면기둥의 용머리조각등 연화문과 거북 무늬가 양각되어 있도 H자 형의 선각과 기단측면에 용비어천도가 새겨져 있는 장식등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특징의 건축의장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글락전,삼성각,산신각,부도 가 있다.   

 반야용선 형상의 극락전 과 기단은 다른사찰에서 볼수 없는 특이한 볼꺼리다.  건물아래 기단 축대석에는 거북,게,물고기등과 연화문이 양각되어 있으며, H자형 선각이 연속되어 있고  H자형은 배의 용골을 의미하기 도 한다.

       

  청도여행에서 빼놓을수 없는 천년고찰 운문사에서  운문사 불교의 모습을  느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운문사(雲門寺)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虎踞山, 또는 운문산) 밑에  있는 사찰입니다.
         신라 진흥왕 21년(560년)에 신승(神僧)이 창건하여 대작갑사(大鵲岬寺)라 하였다
         608년 원광국사(圓光國師)가 중건하였다. 고려 태조 20년(937년)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중건하여 작갑사(鵲岬寺)라고
        하였다.    태조 26년(943년) 태조가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하여 운문사(雲門寺)라 불리게 되었다. 
        숙종 10년(1105년)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중창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불탔다. 
        조선 숙종 16년(1690년) 설송(雪松)이 중건하였다. 현재는 비구니 전문강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여러차례 중창을 통해 오늘날 모습이라고 한다1950년 비구니사찰이되었고 한다.   

          보물 678호 운문사 삼층석탑! 이 탑은 높이5.4m의 쌍탑으로 9세기 통일신라시대 의 3층석탑으로 
     운문사 대웅보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두 탑은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의 탑이다.

     기단에는 8부중상을 새겨 놓았는데 모두 앉아있는 모습이 좋아서 한참 들여다 보고왔다. 

 

   부산으로 돌아 오는 길 옆에 희귀 천연기념물 청도매전면 처진소나무 유송을 만났습니다. view 발행

    국내에 이곳 청도 동산리 처진소나무 보다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들이 많이 있다.

 바람흔적이 살고있는 부산 수영사적공원에도 수령    400년된 해송이있고,

기장군 죽성리도 오래된 소나무가 있다.  그래도 그 소나무들은 천연기념물이 아니 노송들 일 뿐이다. 

 이 나무는 나무의 가지가 수양버들 같이 처졌다고 하여  유송(柳松)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무의 형태가 이러한 것은 주변의 나무에

    의해   눌려 처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원인은  모른다고 한다.

   나무가 다른 가지에 눌려 그늘이 심하면 살수 없는 것인데  살아 남을 수 있었으니 귀한 나무라고 볼수 밖에 없다.
   그래서 천연기념물이 되었는지 ? 

옛날 어느 정승이 이 소나무 앞을 지나갈때 갑자기 큰절을 하듯이   소나무 가지가 밑으로 처지더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나무의 크기는 높이14m 나무둘레 1.96m이며 가지폭은 동서로 10.3m 남북으로 9.1m 정도 파졌고,
    지는 거의 지면까지 쳐져있다. 소나무의 나이는 200년정도 된것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청도 하루여행을 다녀왔습니다. 
 

Posted by 혜 천

 경북 봉화 한번 가기 쉽지 않은 곳이라 지나쳐 다녀본 적은 있어도  닭실마을을 찾아 나선 것은 첫번째입니다. 경상도 중에서도 강원도에 가까울 만큼 윗쪽에 붙어 있어 한번 가기가 싶지는 않은곳 입니다. 매스컴에서 보았던  그 닭실마을 이번 여행의 목적지로 안동권씨 집성촌의 마을로 조선시대 문신이자 학자이신 총재권벌 선생이 마을에 입향하여 후손들이  지금껏 살고있는 마을입니다. 

여행을 출발하기전에 봉화 닭실마을과 청암정에 대해 검색하여 사전 자료를  익히 알고 갔습니다,그내용인 즉, 닭실마을은  영남의 4대길지 가운데 한곳이라고 하는데, "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 금란포란형( 金鷄抱卵形)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 닭실마을이라 합니다.
 
닭실마을이 금계포란(金鷄抱卵)형국이라는데 그게  뭘꼬 하면 닭실은 동북에 있는 문수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그 줄기에서 서남으로 뻗어 내려온 백설령이 암탉이 알을 품은 듯한 형세로 자리하고 5시방향 즉 간좌곤향으로 마을을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안산으로 있는 옥저봉은 수탉이 활개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즉 닭실의 지세는 수탉과 암탉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 사랑을 나누며 알을 품는 명당이다. 닭이 알을 품은 형태는 자손들이 많이 번창하며, 동시에 재산도 크게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길지라고 하네요. 


 이곳은 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된 ‘내성유곡권충재관계유적’이다.이 마을은 약 500여 년 전,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충재(沖齋) 권벌( 1478~1548)선생께서 마을에 입향하신 이후 지금까지도 후손들이 지켜오고 있는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나지막한 산과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지형인 이곳은, 나라를 위한 충 사상이 지배하던 곳이다. 평소에는 농사를 근본으로 하여 학문에 힘쓰다가, 나라가 위태해질 때면 목숨을 다해 나라를 지키던 사람들이 살아온 곳이다. 특히, 대한제국말기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의 주권침탈기에는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힘을 아끼지 않아 ‘충절의 마을’이라는 별칭까지 얻기도 했던 곳 중의 한 곳이 바로 이곳 ‘유곡1리 달실마을’이다. 현재는 마을의 구성원들 대부분이 농사를 주로 하며 생활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풍수가 이중환은 오래 전에 달실을 경주의 양동, 안동의 내앞, 풍산의 하회마을과 함께 삼남의 4대 길지로 뽑았다. 유곡일대의 봉화지역은 전란의 피해가없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 달실마을이 닭실마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풍수지리에서 명당은 산, 강 그리고 바람 등 자연의 기운에 의하여 형성된다. 이곳 달실의 지세를 풍수이론으로 분석하면 역시 명당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역시 숨어있는 길지라도 드라마  한편 방영되면 그곳은 세상에 까발려지고 마는데 이곳도 그렇게 세상에 알려져 < 드라마 - 바람의화원 - 신윤복(문근영) 김홍도(박신양)이 물그림자를 드리우고 서있던 그 돌다리가 청암정다리인가 싶다. 

청암정에는 전해오는 이야기가 하나있다. 청암정이 있는  바위가 거북모양이다. 처음 청암정을 지울 당시 청암정의 안쪽방에 온돌을 만들었는데 지나가던 고승이 거북의 등에 불을 피웠서는 않된다고 말하는 바람에 온돌을 없앴다고 한다. 그 돌다리를 건너며 그때 그 이야기가 생각 났습니다. 

 


청암정은 마을의 중앙부위에 위치한 청암정은 500년이라는 마을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거북이 모양의 바위위에 정자를 건축하고, 바위주변에는 거북이가 좋아하는 물을 담기위해 인공연못을 조성 곳이다. 흔히 아름다운 자연물위에 인공물을 건축할 경우, 불가피하게 자연물의 인공물에 가려져 그 아름다움을 잃게 된다. 그러나 청암정의 경우에는 그 반대의 경우에 해당된다. 지금까지도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정자를 꼽으라고 하면 그 순위권 안에는 청암정이 있다. 이는 바로 거북이 바위위에 지어진 청암정이 기존의 바위와 아주 잘 이룬 조화 때문이라고 한다.


이 청암정은 넓은 마루를 가지고 있어 전통식 교육체험에 적합한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과거 이곳은 마을의 입향조인 충재선생께서 공부를 하기위한 장소로 건립하였고, 그의 사후에는 후손들이 서당으로 활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전통식 교육체험의 경우 과거의 향수를 느껴 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마을의 종가 경내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앞에는석천계곡이 흐르고 있다. 전설이 담긴 기암괴석과 금강소나무 숲 사이로 내성천의 물줄기가 흐르는 곳이다. 조선시대에 건축된 석천정사(石泉精舍)와 바로 옆의 삼계서원(三溪書院) 또한 그 건축미가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요즘 같은 가뭄이 해갈되고 장마가 되어 냇물이 많은  여름철이면, 시원한 소나무 숲과 바위계곡에 흐르는 계곡물을 찾아오는 피서객이 끊이질 않는다.
 
특히 이곳의 장점은 일찍이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훼손되지 않고 이어져 오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이라 할 수 있다. 석천계곡은 일제시대 신작로가 세워지기 전의 닭실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였다. 마을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오랜 여정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이 계곡에서 잠시 쉬며 여독을 풀었다고 한다. 기이한 기암괴석과 울창한 소나무숲에 아기자기한 계곡의 물이 웅장한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마을의 종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석천정사가 있는데 1526년 최초로 건립된 이 정사는 닭실마을에서 오솔길을 돌아가면 볼 수 있다. 이 정사는 주변 환경과 잘 어울려 고아한 분위기를 내며 연중 방문객이 끊이질 않는 명소로도 유명하다. 난간이 있는 넓은 마루는 대략 100여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커서, 예전에는 여름철 학문이나 모임에 사용되었던 곳이라고 전해져 온다. 청암정과 더불어 주변환경과 조화를 잘 이룬 빼어난 전통 건축물로 인정받고 있다.  마을의 종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의 서쪽끝에 위치한 추원재는 선영의 묘소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던 추원재가 있다. 그 건축미와 기능 및 역사로 인해 문화재로 지정받은 곳 중의 한 곳이다. 2층의 누각이 포함된 口자형태의 추원재는 100명 정도의 인원이 관련 체험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이다. 산과 산 사이의 골짜이기에 위치하고 있고, 주변에는 건물에 딸린 농지가 많이 있다. 

 

여행정보
여행지 : 봉화 닭실마을
위치 :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전화 문의/안내: 봉화 닭실마을 054-674-0963 ,봉화군청 054-679-6114

 

Posted by 혜 천

강원도 태백 황지 연못 샘물이  흘러 흘러 낙동강물이 되니 

시작은 미미하나 그 결과는 장대하다는 말같이 낙동강물도 이러한 것 같다.

시작되는 물은 자주 보지 못해도 마지막에 바닷물과 만나는 낙동강하구

물길은 하루 한번씩 보고 있다.  조용히 낙동강 까지 흘러오면서 숫한 지역을

통과하며 아름다움을 만들어 주고 낙동강하구에서 생을 마감하는 낙동강 물이

아니던가.

 

이번여행은 강원도와 경북 북부지방 낙동강 물길을 보고 왔다.

영월 동강 어라연 그리고 오늘 이야기 하고져하는 낙동강의 지류 내성천

이 흐르는 예천 회령포 가 그곳이다.

 

낙동강 물길은 보면볼수록 매력을 많이 가진 물길이다.

예전에 안동 하회마을 과 상주경천대를 보며 물길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모습을 

봤지만 오늘 보는 회령포 물돌이는 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물길이 뱀처럼 구불구불 하다 못해  350도 회돌아 흘려가고있다.

사람 눈으로 볼수있는 각도가 180가 채되지 않는데 350도로 회돌아 흘러가니

자연 내 자신도 350도로 눈을 돌려야 볼수있는 물길이다.     

 

 

 

                    

회룡이라는 말은 태고에 용이 내성천을 타고 상류를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유래된 것이라고 합니다.이 마을에는 ‘이계바위’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곳은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고 사시사철 나룻배가 넘나들어 고을관리들과 기생들의 놀이터로 유명한  장소였답니다.  그러나 여름 어느 날 ‘이계’라는 기생이 놀다가 커다란 동굴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 마을 사또는 이 바위를 ‘이계바위’라 칭하고 정성스레 제사를 지내주었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비가 오는 날이면 동굴 속에서 여러 동물들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기도 하고 날씨가  맑고 좋은 날이면 강 상류 30리 밖 개포면 동송마을의 떡방아 찧은 소리, 개 짓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지금은 동굴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 바위만은 옛 모습을 간지기한 채 그대로 남아 있답니다

 

 

 

회룡포(回龍浦)는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 용(龍)이 날아 오르는 것 처럼 물을 휘감아 돌아간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높이 190m의 비룡산(飛龍山)에서 내려다 보면 350  되돌아서 흘러 나가는 한 폭의 그림 같은 (육지 속의 섬마을)이다.

 

맑은 물과 금빛 모래사장이 어우러져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으며 비룡산에는 천년고찰인 장안사(長安寺)가

있고 계단을 올라 회룡대(回龍臺)에 이르면 이 절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맑은 물과 금빛 모래사장이 어우러져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으며 비룡산에는 천년고찰인 장안사(長安寺)가

있고 계단을 올라 회룡대(回龍臺)에 이르면 이 절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곳 회룡대에서 회룡포마을을 내려다 보면  물길이 어떻게 회돌아 가는지 잘 볼수있다.

그래서 회령포를 볼려면 먼저 이곳 회룡대에 올라 물길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그리고 회룡포로 내려 가야 된다.

 

 

예천 용궁면이라는 이 곳의 지명은 말 그대로 용(龍)의 궁(宮)을 표현하는 곳이다. 즉 왕의 거처라는 뜻. 그래서 이 곳을 차지하기 위해 견훤과 왕건이 크게 전쟁을 치렀던 곳이며, 삼국유사에 따르면 결국 용궁을 차지한 태조 왕건이 용문사의 두문선사에게  이 곳을 어떻게 다스려야 좋을지 자문을 구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자료가 말해주듯이 회령포는 예전의 예전부터 그 중요성이 인정되었던 곳이다.  

 

아주 예전에는 이곳을 ‘의성개(개는 ’강어귀의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이라는 뜻)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후  의성포라 부르다가 회룡포로 비꿨다고 한다.

 

 

 

마을을 이어주는 다리 사뿐히 건너보세요 
물돌이 회룡포를 보시려면 마을로 바로 들어가지 말고 비룡산에 있는 장안사를 따라 전망대로
 올라오세요. 그럼 산책로를 따라 난 팔각정의 전망대에서 한 눈으로 펼쳐 보이는 동화의 마을 회룡포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산과 들과 강의 사랑스러운 어울림은 그대로 한 편의 전원교향악이 될것같으며

 마을엔 9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아요.그리고  모두 경주 김씨랍니다.

경주 김씨가 풍양면 사막마을에 살다가 피난 와서 자리 잡은 곳이 여기리고 합니다.. 

 

 

지금은 구멍뚫린 철판으로 다리를 놓아 걸어 들어갈수있는 뽕뽕다리가 있으니 주민들이 수월하게 왕래를 할수있지  예전에는 배를 타고 나가야 되니 섬이 맞긴 맞았나 봅니다.


 

 

 

등산로를 따라 40여분 걷다 보면 삼한시대부터 치열한 격전지였던 원산성(圓山城)이 나타나고

 남쪽으로는 낙동강(洛東江). 내성천(乃城川).금천(錦川)이 하나로 합쳐지는 삼강(三江)의 풍경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회령포를 둘러 보고 삼강의 풍경을 보러 삼강주막으로 행하여 발길을 옮겨 놓았다.

 

 

2000년 KBS드라마 가을동화의 찰영지로 유명하며. 인근에는 용궁향교. 세금내는 나무로 알려진 황목근.

 산택 연꽃공원. 낙동강 700리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삼강주막 등이 있고 향석리에는 농촌체험과 숙박이 가능한

 회룡포여울마을(구. 향석초등학교)이 있다

 

 

 

 

 

 

 

여행정보

* 명승지 회룡포

* 주소 경북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 950  ( 용궁면 향석길 60) 
* 전화번호 054-650-6789 정보센터 : 054-653-6696

 

회룡포를 둘러보고 뱃사공도 주모도 없는 예천 삼강마을로  발걸음을 옮겨 보자.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는 세 물줄기가 모이는 곳이 있습니다. 안동댐을 지나온 낙동강, 태백산에서 발원한 내성천, 죽월산의 금천 이곳을 “삼강”이라고 합니다.


아주 먼 옛날 
이 삼강나루터는 경남 김해에서 올라오는 소금배가 경북 안동 하회마을까지 가는 길목이었고, 문경새재를 넘어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쳐 가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삼강나루는 교통과 물류의 중심이었다. 낙동강을 거슬러 온 사람들이 안동이나 강원도로 향하는 길목이었고, 상주나 문경세재로 향하던 갈림길 이기도 했다.

 

나루터 자리를 찾아가도 삼강나루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4대강 사업이 추진되면서 나루터를 복원하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 옛 정취를 느끼며 나룻배를 탈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뱃사공도, 주모도 없는 삼강주막에는 옛날의 모습을 보기위해 찾아오는 관광객들만 모여들고 있었다. 

 

 

 

나루터 자리엔 신식 다리가 놓여 있고, 흔적을 찾는 사람들만 모여 들고 있었다.

 

 

 

 

그때의 삼강나루는 교통과 물류의 중심이었다. 낙동강을 거슬러 온 사람들이 안동이나 강원도로 향하는 길목이었고, 상주나 문경세재로 향하던 갈림길 이기도 했다.  삼강나루로 모여든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 삼강주막(풍양면 삼강리 166-1)이다.

물류를 운반하던 보부상들과 사공들이며, 경상도에서 서울이나 강원도로 먼 길을 나선 사람들에게도 주막은 꼭 필요한 곳이었다. 삼강주막은 1900년대에 만들어진 후, 2006년 마지막 주모 유옥련 할머니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영업을 이어왔던 곳으로, 우리나라 최후의 주막이었던 셈이다. 2005년에는 역사,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유옥련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방치되어 왔던 주막을 예천군에서 2007년에 복원하고, 보부상숙소와 사공숙소 등도 함께 지었다. 복원된 주막의 처마 아래 늙은 주모의 사진도 걸어 두었다. 주막의 부엌에는 외상장부를 대신한 작대기 표시가 남아있다. 긴 작대기는 한 주전자, 짧은 작대기는 한잔 술을 외상한 흔적이다. 주막 밖에는 500년의 세월을 간직한 회화나무가 지난 세월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의연히 서있다.

 

 

느티나무 아래는 장터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쌀과 잡곡이며, 소금 등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나무그늘 아래 놓여진 둥근 들돌도 여행객의 시선을 끈다. 120kg이나 되는 들돌은 어른이 된 것을 증명하는 도구였다. 그 돌을 들 수 있는 정도에 따라 품값이 정해졌다. 그 무게에 호기심을 느낀 여행객들이 한번씩 들돌을 안고 힘을 써본다. 들돌 옆쪽으로 싸릿대를 이어만든 옛날 화장실도 아이들에게 신기한 볼거리다.

 

 

 

여행정보

* 여행지 : 삼강주막

*위    치 :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전화번호 : 풍양면사무소 054-653-6301, 예천군청 문화관광과 054-650-6391, 6394

 

 

Posted by 혜 천

 

여름같은 봄날 !

 

경주시내 곳곳에서 볼수있는 고분군들보다 작은 모습의 무덤들이

대구에서도 볼수있다. 경주의 고분들은 왕들의 무덤이 많지만 이곳

대구 불로동고분군들은 이지역에 살았던 지배계층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도심속에 고분들이 있으면 산책을 하거나 도보여행을 하기 좋다.

불로동고분군들이 대구시내에 위치해있어 데구 올레 단산지 가는길로 개발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요하고 있다.

 

입구의 잘 정비된 봉분 몇기를 지나 50여m쯤 산책로를 따라

언덕위에 올라서면 웅장하고 위엄서린 경주의 왕릉과는

또다른 이색적인 느낌이 드는 대·소고분이 나타난다.

 

탁트인 능성따라 고분군이 산 봉우리로 착각이 들 정도로 볼록볼록 솟아있다.

친근감드는 고분군 사이를 걸어 보며 봄날을 느껴 본다.

 

   

 

이 고분군은 팔공산의 지맥이 길게 뻗어내려와 경부 고속도로에 의해 잘리운 일대의 능선으로

볼로동 및 봉무동, 도동의 구릉에 분포하여 있는 봉토분으로 현재 210의 고분이 밀집되있다.

 

 

 

불로동 고분군(不老洞古墳群)은 삼국시대의 무덤군이라고 한다.

사적 제262호로 지정된곳으로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토착 지배 세력의 집단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데,

외형이 명확하지 않은 고분을 제외하고도 그 수가 무려 210기에 이른다. 

 

 

언뜻 봐도 수백기가 족히 넘어 보이는데, 분구의 규모는 지름 15~20m, 높이 4m 전후하여 제법 웅장한 느낌을 준다.

매장 주체부인 수혈식석곽의 규모는 길이 4.5~8m, 너비 0.8~1.2m, 깊이 1.0~2.2m 정도이다.

석곽의 네 벽은 냇돌 또는 깬돌을 이용하여 쌓고, 바닥은 특별한 시설을 하지 않는다.

 

 

일부 석곽에는 간벽을 쌓아 유물을 부장하는 공간과 시신을 매장하는 것이다.

발굴 당시 이미 상당수의 금은제 유물이 도굴된 뒤였지만, 고대사회의 일면과 대구 분지의 옛 모습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1978년 한국의 고분군으로서는 최초로 사적 제262호로 지정되었다.


 

 

불로동 고분군 공영주차장에서 고분군을 한바퀴돌면 1.8 km걸린다.

경부고속도로 굴다리, 봉무공원, 단산지를 거쳐 만보산책로 도보여행해봄도 좋은 봄날이다.

 

 

 

이곳 무덤에는 이름모르는 작은 야생화가 꽃을 피우고 있다.

 봄이면 많은 종류의 야생화가 꽃을 피워 봄나들이 나온 사람들은 덤으로 야생화구경까지 할수있다.

이꽃의 이름이 아마 제비꽃 아니라 생각된다..

 

 

여행지 정보

1> 여행지 : 대구 불로동고분

2> 위치 :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

3> 전화 : 053-984-3506.


 

Posted by 혜 천

 

             그냥 하나의 섬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듣고 배워온 우리영토!

             그 독도에 난생 처음발을 딛혀 본것이다.

 

             울릉도엘 세번갔었지만

             독도는  첫 상륙이니 ,

             가고 싶다고 가 지질 않는

             하늘의 하락을 받아야 발을 딛혀 볼수있는

             그런 곳이 독도인가 싶었습니다.  

                

             독도 !!!

             일본은

             이번에도 독도를 교과서에 실어 자기네 영토라고

             우길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합니다.

 

             일본놈들이 탐내는 동쪽의 우리땅  

             그 귀한 곳에 발을 딛혀 보니

             과연 아름답구나 !  감개가 무량하기 까지 한 것 이였습니다.

 

             심심하면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 독도

             우리도 좀 더 확고한 대책으로 그런 짓을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때가 많습니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따라 이백리 외로운섬 하나 새들의고향 ....』
             이라는 노래 가사 처럼 
             독도여행을 계획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고, 실제로 가는 건 더 어려운 것이 독도여행이다.

             울릉도에 도착한 뒤에도 독도가 저 앞인데
             파도가 높아 상륙이 불가능 하기 때문에 그저 섬을 한바뀌 돌다가 돌아온적이 있었다.
 

            육지에서 힘들게 울릉도까지 그리고 독도까지  왔는데 

            독도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돌아온적이 있었는데 많이 아쉽드라구요.

 

           그러나 이번에는 하느님께서 돌보셨어  독도에 발을 딛혀 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어럽기 때문에 하늘이 허락한 자 만이 상륙할수있는 여행지라고 하나 봅니다.

           독도에 도착하여 첫발을 디딛니 그 감동 이루 말할수 없드라구요!


           관광선을 타고온 배는
           30분 정도 선착장 주변을 둘러보며 신비의 독도를 구경하고 왔습니다. 

 

          

                  대한민국 동쪽 땅끝이 이곳입니다.

                 독도는 동도,서도 -2개의 섬과 89개의 부속암초로 이우러져있다.

                 동도는 높이98.6m이다. 동도봉우리를 일출봉이라고 부른다.

                 산봉우리 부분이 비교적 평평하여  독도경비대와 독도등대등 각종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 동도 주위에는 독립문바위, 숫돌바위,갈매기바위등의 기암괴석이 있으며
                 유람선이 정박할수있는 접안시설이 설치되어있다.

 

 

           

                동도 접안시설에서 첫발을 딛혔지만

               관광객이 둘러 볼수있는곳는 접안시설 주위뿐이다.

               마음같았으면 독도경비대엔 못들어가도 , 독도등대도 보고 싶었고

               그곳의 희귀동식물들도 봤으면 했는데 그게 뜻대로 않죠.

 

 

 

              

                접안시설 반대편이 서도입니다.

                저곳엔 들어갈수 없죠!

 

                서도에는 어민 관련 시설이 주류를 이룬다.

                즉, 어민 숙소, 해산물 건조장, 전마선 인양기,

               급수조 등 어민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시설만을 갖추고 있다.

                서도는 동도에 비해 면적이 다소 크고 표고가 높으며 서도 진입 계단의 경사도는 매우 가파른 급경사를 이룬다.

                 현재 서도에는 민간인 부부 1가구가 고기잡이와 해산물을 채취하며 어업인 숙소에서 생활하고 있다.

                 주요 볼거리는 탕건봉과 코끼리바위 등이 있다.

 

 

 

 

 

 

 

 

 

 

                < TIP > 울릉도에 대한 기본상식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에 있는 섬.

               독도의 2개 주요 섬 중의 동쪽 섬으로서 우리나라 최동단에 위치한다.

               신라 지증왕 13년(512) 우산도(于山島)라는 명칭에서 출발하여

               삼봉도(三峰島)·가지도(可支島)·석도(石島) 등으로  불렀으며,

               1881년 이후 독도로 명명되었다.

               행정 지명으로서 독도(獨島)라는 명칭은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에 의해서 최초로 사용되었다.

Posted by 혜 천


청도에서 운문가는 도로 옆에 귀한 소나무 한그루가
차를 세우게 한다.  정확한 위치는 청도군 매전면 동산리이다.

소나무가 천연기념제295호로 지정된것은  보기 힘든것이다.
국내에 이곳 동산리 처진소나무 보다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들이
많이 있다. 바람흔적이 살고있는 부산 수영사적공원에도 수령
400년된 해송이있고, 기장군 죽성리도 오래도니소나무가 있다.
그래도 그 소나무들은 천연기념물이 아니 노송들 일 뿐이다.

이나무는 나무의 가지가 수양버들 같이 처졌다고 하여
유송(柳松)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무의 형태가 이러한 것은 주변의 나무에 의해 눌려 처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원인은  모른다고 한다.

나무가 다른 가지에 눌려 그늘이 심하면 살수 없는 것인데
살아 남을 수 있었으니 귀한 나무라고 볼수 밖에 없다.
그래서 천연기념물이 되었는지 ? 확실한 것은 다음에 알아봐야 겠다.

옛날 어느 정승이 이 소나무 앞을 지나갈때 갑자기 큰절을 하듯이
소나무 가지가 밑으로 처지더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나무의 크기는 높이14m 나무둘레 1.96m이며 가지폭은 동서로 10.3m 남북으로 9.1m 정도 파졌고,
 지는 거의 지면까지 쳐져있다. 소나무의 나이는 200년정도 된것으로 보고 있다.


속리산의 정이품송 처럼 가지가 처져있다.
어째던 희귀한 소나무 한그루가 외롭게 서있으니 이곳을 여행하며 지나는 분들은 한번 보세요?

 
Posted by 혜 천

20일 KBS2 1박2일에서의 곰인형 배달 레이스 프로를
보며 재치있고 재미있게 웃음을 자아 낼수 있도록
엮어 놓은 방송을 보며 여행도 마음 맞는 친구끼리
재미있고 웃음을 자아내는 그런 여행이면 참 좋겠다고
느겼다.

한번은 친구들과 한번은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울릉도
 여행을 하며 도동에서 행남등대까지 산책한 코스라
 더 재미있게 프로를 시청하기도 했다.

 친구들과함께 할때는 엄태웅,이수근,강호동이 출발한
포항에서 션 플라어호를 타고 갔는데  파도가 높아
 고생을 했다.

포항에서 을릉도로 정기 운행하는 썬플라어호를 타고 10시 츨항 ,3시간 소요되는데 풍랑으로 4시간이 걸려 을릉도 도동항에 도착했다 . 도동항은 천연요새 같이 동서북쪽으로 빙∼둘러 쳐진 병풍같이 웅장하게 솟아오른 기암괴석으로 절벽을 이루고있는 아름다운 항구다.

작년에 여불단과 함께 갈때는 이승기,김종민 은지원 3명이 출발한 코스로 묵호항에 도착하니 아침때라 김종민이 배고프다며 곰인형을 등에 업고 묵호항 대합실 2층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곳에서 우리도 아침을 먹었다  그곳 식당에는 메뉴가 동태찌게와 된장찌게 2종류 밖에없다.두 종류중에 골라야 한다. 묵호에서 오전10시 출발하여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한다.

        


  묵호항 여객선 터미널 2층 식당에서의 아침식사 동태찌게입니다. 인근에 나가는 것이
 싫어 거의 대부분의사람들이 이곳을 이용하니 늘 북쩍북쩍 합니다. 어떤때는 줄을서서
 기다려야 아침 식사를 할 정도입니다.


 1박2일 팀들의 울릉도 행남등대 까지의 배달레이스의  개략적인 줄거리는
 서울에서 번호가 적힌 큰상자를 선택해 안쪽에 있는 물건을 확인 후 최종 목적지 까지
  안전하게 배달해야 하는 미션을 수행하게 되는 프로그램이였다. 특히 멤버들은 자신의
  물건을 뺏기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게임 이기도 하구.

최종목적지 울릉도까지 안전하게 배달에 성공한 멤버는 포근한 실내 취침과 1명 구제권이 보장됐다.

다른 멤버들의 물건을 모르는 상황에서 상자 속 내용물을 확인한 멤버들은 큰 곰인형이 들어있는 것을 확인 후 망연자실했다. 이들은 각자 큰 곰인형을 어떻게 목적지까지 빼았끼지 않고 배달해야 될 지 고민을 한다.

멤버들은 목적지를 향하여 가던 중 휴게소에서 서로의 물건이 곰인형인 것을 확인하게 됐다. 이후 이들은 배신과 음모로 서로를 속이고 타협하며 긴박한 승부를 벌리는 재미있는  과정을 그렸다.

다른 멤버들에 비해 뒤늦게 출발한 이승기는 울릉도로 입성하기 위한 관문인 묵호항에 도착했다. 이승기는 마침 먼저 항구에 도착해 깊은 잠에 빠져든 은지원을 발견, 손쉽게 그의 인형을 탈취해 탈락시켰다.

은지원과 동맹을 맺은 이승기는 김종민을 공략했다. 하지만 이승기는 막판 변심한 은지원으로 인해 탈락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이후 김종민, 이승기, 은지원은 가수라인으로 동맹을 맺었다.

이들과 다른 루트인 포항항에 도착한 엄태웅은 강호동, 이수근의 갖은 견제 속에도 인형을 무사히 지켜냈다. 이 과정서 멤버들은 동맹과 배신을 반복하며 한순간도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이후 울릉도에 도착한 멤버들은 최종 도착지인 행남등대까지 내달리게 됐다. 특히 이미 탈락한 멤버들도 이 레이스에 동참해 서로에게 혼란을 줬다.

특히 김종민은 시종일관 엄태웅을 속이며 레이스에서 1등을 차지하는 듯 싶었지만 승리의 여신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꾸준하고 성실히 임무를 수행한 엄태웅이 이날 레이스 1등을
 차지하는 기쁨을 누렸다. 한편 이날 엄태웅은 실내취침 동반자로 이수근을 선택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는 내용으로 울릉도의 아름다운 해안산책로를 보며 이들이 펼치는 채치있고
 웃음 나오게하는 행동들이 1박2일을 더 재미있게 했다. 

1박2일 엄태웅 , 김종민, 이승기,은지원,이수근,강호동 6명이 펼치는 배달레이스를 보며
 또 가고싶게 만드는 프로였다. 

              
  울릉도 도동항에 여객선이 보입니다.  여객선 너머 해안선 파도 따라 산책로가 보입니다.  

 도동항은 참 경치가 좋습니다.  왼쩍으로는 행남등대가는 해안산책로가 있으며 오른편으로도 산책로가 잘 만들어져 있다. 오른폄 산책로는 해돋이 감상으로 좋은곳이다. 

 
 1박2일 팀들이 곰인형 배달레이스를 펼치며 행남등대로 행하는 출발 지점으로
 도동항 입구 산책로이다.   


울릉도 관광의 절정은 행남산책로다.
도동부두 좌해안을 따라 개설된 산책로가 절경이다. 자연동굴과 골짜기를 연결하는 교량
 사이로 펼쳐지는 해안 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야간 조명 아래 비치는 해안산책로는 연인들이 데이트 하기 좋은 장소 인것 같다.



    
      도동항에서 얼마간 걸으면 골짜기에 용궁이라는 음식점 이있습니다.
      주로 해물을 팔고있는 집이라 눈여겨 봐두었다가 저녁에 술을 마실줄 아는 몇명이
      나오기로 한곳입니다.

   
      날이 저물고 어둠이 내리자 산책로 골짜기에 있는 용궁이라는 음식점에서 
     소라,자연산굴, 산오징어회로 소주와 맥주를 한잔씩 하였답니다.  


 
 이경사 해안로에선 김종민이 엄태웅에게 협상하자며 지연시키지만 순둥이 엄태웅은
 앞질러 행하니  가버린다.
 



행남산책로가 끝나는 곳에는 길이 갈라진다. 하나는 바다가로 이어지는 불과 100미터 이내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등대로 이어지는 길이다. 다다르면 멀리 죽도가 보이는 곳인데 저동항의  촛대바위가 선명하게 보인다. 이곳에 명당자리 인 것같다.




                       
                           죽도에는 한사람이 살고있다 한다.


해안산책로는 행남 마을과 이어진다.마을 어귀에 큰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고 해서 살구남으로도 전해오고 있다. 마을에서 400m 정도의 거리에 있는 행남등대는 뱃길을 밝혀준다. 해송 사이로 이어지는 등대오솔길은 가을철에 노란 털머위 꽃이 군락을 이루어 장관을 연출한다. 등대에서는 저동항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해안산책로 코스는 왕복 1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Posted by 혜 천
역사 시간에 개괄적으로 배우면서 무조건 외워야 되었던
서원이름들 ,안동의  도산서원 풍기의 백운동서원,
 소수서원 이렇게 줄줄 외워야 시험에 점수를 잘 딸 수
 있었던 시절이 생각났다.
 
그런후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풍기 소수서원은 이번이
 처음이니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늦게나마
 찾아왔으니 꼼꼼시리 보고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이곳
 저곳을 두루 살펴본다.

소수서원으로 들어서자 절의 위치를 알리는 당간지주가
나타난다. 당간지주는 절에 불교의식이나 행사가 있을때
 당이라는 깃발을 높이 다는 것인데 이상하다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곳이 통일신라시대 세워진 숙수사라는 절이있던
 곳으로 숙수사 당간지주(보물제59호) 로 세조3년 단종복위
운동의 실패로 이곳 순흥지방이 큰피해를 입었는데
그영향으로 폐사 되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다 

 

                                         취한대


   세조 3년 단종복위 운동의 실패로 금성대군을 위시해서 순흥지방 주민의 처형으로
  그 피가 이곳까지  흘러내려와서 그 원혼의 울음소리를 달래려고 주세봉이 부임하여 
   붉은 글씨로 경자를 쓰고 제사를 지내주자  원혼들의 울음소리가 조용해졌다고 한곳이다.    

     숙수사지 당간지주와 출토된 유물들

  백운동서원에서 소수서원으로
조선시대 1542년 중종37년 풍기군수 주세봉이 안향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고 1543년 중종38년 유생들 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을 세웠다.그호 1549년 명종3년 퇴계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경상감사 심통원에게 계청하자 1550년 왕명으로 대제학 신광한이 서원 이름을 旣廢之學 紹而修之 ( 기폐지학 소이수지 =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한다) 에서 < 紹修 > 라 지었으며 명종 임금이 직접 < 소수서원 紹修書院> 편액을 써서 하사 하였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 서원이다. 

 

        국보 111 호 안향 영정                    

 안향 (1243-1306년) 처음 이름은 유(裕) 이며 호는 회헌,본관은 순흥, 시호는 문성공 , 밀직부사 부(孚)의 아들이며, 순흥의 평리촌학교에는  그의 태실지와 벼루를 씻은 세연지와 우물이 남아 있다.

1260년(원종1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1288년 고려 유학제거가 되어 왕과 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와 공자,주자의 화상을 가지고 돌아와서 주자학을 연구하었다.

1303년 에는 국하학정 김문정을 중국 강남에 보내어 공자와72 제자의 화상,문묘에 사용할 제기,악기와 육경,제자,사서,주자서등을 구해오게 하는 한편 양현고를 세워 장학사업을 펴고 섬학전을 마련하여 인재양성에 힘쓴 유학자. 그는 주자학을 전래 발전시킨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서 충숙왕때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주세봉은 안향을 동방도학의 시조로 사문에 막대한 공을 남긴 선현이라추앙하였다.

 

                                                   보물  717 호 주세봉 영정  

주세봉 (1495-1554년)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호는 신재,본관은 상주, 시호는 문민공이다.152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교리,예빈시정을 거쳐 풍기군수로 재임중 1542년 순흥 선호동의 숙수사지에 안향의 사당을 건립하고 이듬해에는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당시 산삼공납의 민폐를 덜어주기 위히여 가삼재배의 주산지가 되었다. 즉 풍기인삼이되었다..

 

 

 

         탁영지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겸암 류운용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할때 연못을 파고
       대를 쌓았던 곳.

  소수서원이 안동의 도산서원보다야 크겠는가 한생각이  잘못되어도 많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실감한 곳이었다. 소수서원 자체만 들러보아도 몇시간이 걸릴것 같으며 사료관,
  소수박물관그리고 이곳 선비촌을 둘러볼려면 하루를 잡아야  제대로 볼수있는 역사깊은 곳이라
  생각되었다.   

   여행정보
   1> 위치: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 ( 소수서원) 
    2>전화 :   전화054-634-3310


 

Posted by 혜 천
경북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탑리리,학미리 일원에
세워졌던 삼한시대 진한에 소속된 조그마한 고대국가
조문국이 있었던 의성.

의성에 삼한시대의 부족국가가 있었으며  그 흔적이
이렇게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볼수있었다.
 
이곳에 와서 역사성을 들어보니 삼국사기에  조문국은
삼한시대의 소국으로  성립되었으며, 경덕왕릉(景德王陵)을
 비롯하여 250여기의 릉(陵)이 분포되어 있으며 기원전
124년 초대임금  용왕의 등극부터 서기 245년까지 21대
 369년간 조문국의 왕력 (王歷)이다고 한다..

 의성이 도읍지였으며 신라 벌휴왕 2년 (185년)에 신라의 영향권으로
편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960년대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경희대,경북대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 앞트기식 내지 굴식돌방무덤과 변형
 돌무지덧널무덤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신라토기 가운데
지역색을 강하게
나타내는 <의성양식 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금동관,금동관장식품,금동제귀걸이
 등의 화려한 장신구와 함께  철제 무기류,마구류등이 있다. 현재이 유물들은 
대구대박물관과 경북대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조문국 고분 입구

 

 

 


 조문국은 철제무기가 발달된 나라이며  마구류등이 발견된것으로 보아 ,
  추측컨데 기마부대가 강하지 않았을까?


          

  의성땅에서 번성하던 고대국가 조문국의 역사를 새롭게 재조명하기 위하여 계속 발굴조사중이며 의성군 금성면 초전리  일원 조문초등학교 부지내에 지하1층,지상2층 규모의 조문국 박물관을 착공 완공 계획이라 한다. 

경주 고분군들엔 많은 사람들이 사철 찾아와서 역사를 체험하며 역사공부도 하고, 산책도하며,
즐겨찾는 곳이되고 있는것을  볼때  , 이곳 조문국 고분군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옛 부족국가에
 대해서도  알았으면 좋겠다.   

Posted by 혜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