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천의 Trave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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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5.26 500년된 동백나무 85그루가 꽃피우는 서천마량리 동백나무숲 6
  2. 2011.04.22 찾아오는 관광객 없어 외롭게 서있는 국보 장항리사지 5층석탑 10
  3. 2011.03.31 중국 자금성처럼 우진각지붕을 가진 수원 장안문 그 우람한 예술을 본다 1
  4. 2011.03.30 정조대왕과 정약용의 작품 수원화성 그 출발지 화홍문에 매료를 느끼며 4
  5. 2011.02.07 대한민국 건국시조 단군이후 역대 8 왕조 시조 위패 모신 천진궁 1
  6. 2011.01.25 대나무를 얇고 가늘게 쪼개어 채색하여 만든 채상을 보셨습니까? 3
  7. 2011.01.20 해무와 어선, 갈매기의 하모니가 어우려진 일출명소 진하 명선도와 강양항 1
  8. 2011.01.17 허황옥이 돌배타고 입국한 진해용원 망산도와 유주암 10
  9. 2011.01.12 산초처럼 톡 ∼쏘는 물맛 이라하여 이름 붙여진 초정탄산약수 1
  10. 2011.01.11 물 맑은 옥천 술익는 냄새가 좋은 전통한옥 춘추민속관 2
  11. 2011.01.07 성리학의 외골수 우암 송시열선생 보길도 글씐바위 2
  12. 2011.01.06 안중근의사 처럼 조선시대 나라사랑한 애국자 안용복장군은 누구인가 ? 1
  13. 2011.01.05 향수의 고장 옥천, 실개천과 청석다리가 정겨운 정지용시인 생가 2
  14. 2011.01.04 가야 마지막 구형왕의 돌탑으로 쌓은 피라미트왕릉 1
  15. 2010.12.31 내일 떠오르는해를 위하여 오늘이 있습니다 12
  16. 2010.12.28 김해 가락국 봉황동 황세바위에 얽힌 사랑이야기 3
  17. 2010.12.27 울릉도 망향봉 독도전망대에서 독도가 보입니까?
  18. 2010.12.26 2번째 방문에사 발딛고 온 대한민국 동쪽 땅끝 독도 1
  19. 2010.12.25 울릉도 앞바다 오징어 한마리가 소주안주 오징어물회가 되기까지 2
  20. 2010.12.24 백제무왕의 왕비인 선화공주의 혼이 담긴 미륵사지 8
  21. 2010.12.23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명단자리 사찰을 불태운 대원군
  22. 2010.12.21 초의선사 생가가 있는곳은 어딜까요? 강진 백련사일까요? 2
  23. 2010.12.20 해맞이 명소 여수항일암 소실 원통전 복원은 어쩔꼬 ? 12
  24. 2010.12.16 450년전 한 부부의 사랑과 영혼이 담긴 편지와 미투리 모양의 월영교 1
  25. 2010.12.15 부석사무량수전보다 더 오래된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 봉정사극락전
  26. 2010.12.14 따뜻한 추억속 함라 돌담길 걷다가 들어가 본 조해영가옥
  27. 2010.12.13 황홀하리 만큼 나를 매료시킨 백의관음도가 있는 월출산 무위사 3
  28. 2010.12.03 청도 유호연지를 내려다보는 갤러리 청담에서 차향기와 함께한 여행 4
  29. 2010.12.01 조선시대 냉장고 청도석빙고를 열어본다. 1
  30. 2010.11.30 경주 석굴암보다 100년 앞서 만들어 진 제2 석굴암 군위 삼존석불 5

 

         500년동안 갯바람 맞으며 꽃을 피워온

         천년기념물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 숲엔 아직도

         예쁜 두송이 동배꽃을 만나고 왔다.

 

         5월도 한 열흘 정도의 시간만 흐르면
         여름으로 접어 든다. 

         봄비 내리는 서해안 서천마량리 !

         서천에는 자연산 광어도미 축제가 한창이다.

         회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연산을 찾아 전국을

         다니며 회맛을 보곤 하죠. 여행이란 한가지 목적을 가지고

         다니지는 않는다. 여행에서는 반드시 그곳의 맛집을 찾아

         미각여행도 어울어져야 제대로된 여행이된다고 밑는다.         

 

         그래서 서천여행은 신성리갈대밭, 한산모시관을 둘러보고 춘장대해수욕장을 거쳐

         마량리 동백나무숲에 올라 오력도를 내려다 보는 멋을 즐기고

         마량항과 홍원항에 들러 자연산 조개류나 자연산 광어,도미를구경하고

         입을 즐겁게 하는 여행지이기도 한 곳이 였습니다.       

      

          마량리 동백나무 숲속으로 들어가 보면 500년의 정취를 느끼게 된다.

          그동백나무에 때늦은 동백 두송이가 오롯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쁘게 담아와 그 모습을 세상에 내어 놓습니다.

             서천 8경 중의 한곳이라고 한다.

           이곳위치가 서천서면 마량리이라 일반적으로 마량리동백나무숲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500년동안 서해바다 갯바람에 시달려 키가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옆으로 누워서 자라

           밑둥이 커다랐다.    

 

             서천 화력발전소가 들어 서기전에는 참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옆에 있었다고 한다.

             그 해수욕장은 없어지고 , 동백나무 숲 동산 앞에는 주차장이 멋있고 크게 만들어져 있다.

             자가용을 타고 가서  주차하기 쉽게 되어 있어 주차 걱정없는 곳이다.

               정상에 동백정(冬栢亭)이라는 현판을 가진 정자가 있다.

          정자에 올라 숲을 내려다 보기도 하고 오력도를 감상하기도 한다.

    

         동백은 12월부터 피기 시작하여 이곳처럼 5월초순까지 피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이 5월말인데 우리가 올것이라고  이때껏 기다렸는지 동백꽃을 볼수있었다.

  

 

             오늘은 봄비가 내리고 있지만, 맑은날 동백정에 올라가면 서해의 푸른바다와 낙조의
             아름다움을  한 눈에 볼수있다.

 

 

               500년을 살아온 동백나무 밑둥 입니다.

               세월의 흔적을 볼수있습니다. 갯바람에 얼마나 시달렸기에 저리도 구불구불 하게
               몸서리쳤을까 ?
     그렇게 힘겨웠던 동백나무들을 우리는 즐기고 있다니.... 

   

                   

                    동백나무 고목 밑둥에 두송이 동백꽃이 해맑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고이 담아와서 세상 사람들에게 선을 보입니다.  예쁘죠 .....

 

 

        

           봄이 떠나가니 나, 동백도 가야하나 봅니다.

           여름의 더위가 싫어 가야 합니다. 그래서 꽃잎들은 떨어져 누웠답니다.

           내년봄에 다시 봐요 하며......

 

 

        여행정보

         1> 여행지 : 서천 마량리 동백나무숲

         2>위치 :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 275-1

         3> 전화번호 : 041- 952-7999

         4> 개장시간 : 09:00 -18:00

          5> 입장료 : 성인500원     학생,어린이 : 300-200원

          6> 찾아가는 길 (교통편)

              * 자가운전 : 서해안고속도로 춘장대 나들목 - 국도 21호선 (춘장대방면) - 지방도607호선
                               (비인검문소에서 우회전)

          7> 인근여행지 : 춘장대해수욕장, 서천해양박물관, 홍원항, 부사방조제,마량포,
                                월하성 갯벌체험장.                

                               

Posted by 혜 천


  여행지의 이른 새벽 공기는 맑고 상쾌하다.
  숙소 코오롱 호텔 에서 불국사, 석굴암을 거쳐
  감포 감은사지를 보고 올 요령으로
4번 국도를
  따라 추령고개를 넘자 왼편 가파른 언덕에
  5층 석탑 2기가 보인다.

일행들이 잠시 저곳에 올라갔다가 보고 갑시다.하여
입구를 찾아 들어가는데 입구가 비포장 도로다.

계단을 올라 사지엘 당도하니
뜻밖의 힁재를 만나게 되자 , 야 ∼ 호 소리가 나왔다 !

감은사지 3층석탑 처럼 
2기의 탑이 참 아름답다하는 생각부터 먼저 들어온다.
서쪽의 5층 석탑이 잘생겼다.
동쪽의 5층석탑도 특이한 탑이다.

처음엔 왜 꼭대기 탑신들이 깨어졌을까 궁금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도굴꾼들이 폭약으로 사리엄구를 노리고
폭약을 터트려 파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나쁜 놈들이 이 아름다운 5층석탑을 망가트렸구나 !
생각하니 찍일놈들, 죽일놈들....소리만 반복된다.

아름다운 탑이구나 ! 생각했었는데
역시 국보236호로 지정된 보물이기에 이토록 아름다웠구나...   

토암산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두 계곡을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계곡물은 대종천을 따라 흘러 감은사지를 지나 대왕암 근처로 흘러내린다. 

계곡의 높은 곳에 터를 닦고 중앙에  불상을 모시기 위한 금당이 있었다.
불상을 놓았던 배좌가 남아 있는데  아래,위 두개로 되어 있다.
             

    감은사지 3층석탑보다 규모는 적어도 서탑,동탑 2기에 새겨진 인왕상등은 참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서탑은 2층 기단에 선 5층탑인데 상하층 기단에 기둥이 4개씩 새겨져 있고 옥개받침
   역시 5단으로 정연히 조각되어 있어
 통일 신라 중기에 건립되었음을 보여준다.   

  여덟방향에 창 모양의 안상을 만들어 네곳에는 동물을, 다른 네곳에는 신장을 조각하였다.

 

 이탑의 특징은 1층 옥신석 4개의 면에 부처의 영이 드나드는 문비가 2개가 있다는 것이다. 
  문고리를 도깨비들이 물고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문 양 옆에는 금강역사가 연꽃 위에
  서 있는데 둘 모두 금강저를 쥐고 있어 위엄을 보여준다. 
 

      

 

          < TIP1> 감은사지 3층석탑

 감은사지 넓은 앞뜰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이다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으며, 옛신라의 1탑 중심에서 삼국통일 직후 쌍탑가람으로 가는 최초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당시 틈만 나면 동해로
  쳐들어 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세운 절로,
  동해 바닷가인 이 곳에 터를 잡았다.


 문무왕은 생전에 절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즉위 이듬해인 682년에 완공하였다. 이러한 호국사상은 탑에도 이어져 장중하고 엄숙하면서도 기백이 넘치는 탑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부분들이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십개에
 이르는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는 것이다. 탑을 세운 시기는 신문왕 2년(682)으로,
1960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서쪽탑 3층 몸돌에서 청동제사리(보물 제366-1호)와 청동제사각감(보물 제366-2호)이 발견되었다. 경주에 있는 3층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실로 한국석탑을 대표할 만하다라고 들 표현하는 석탑이다.

            

   장항리사지는 토함산 동쪽의 한 능선이 끝나는 기슭에 마련된 절터로서, 절의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없어
마을의 이름인 ‘장항리’를 따서 장항리사지라 부르고 있다.  

   이 곳에는 현재 금당터를 중심으로 동탑과 서탑이 나란히 서 있는데, 1923년 도굴범에
  의해 붕괴된 것을 1932년에 복원이
 가능한 서탑만을 새로이 복원해 놓았다. 동탑은 1층
   탑신(塔身)과 5층까지의 지붕돌만 남아있으나, 서탑은 약간 소실된 것을
  빼고는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서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기단부는 비교적 넓게 만들어져 안정감이 있으며,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을
   본떠 조각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1층 몸돌의 각 면마다
   문을 지키고 서 있는 한 쌍의 인왕상(仁王像)을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고 있고, 경사면은 평평하고 얇으며 네 귀퉁이는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경쾌함을 더하고 있다. 5층 지붕돌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이 남아 있다.

  탑의 1층 몸돌 각 면에 한 쌍의 인왕상을 정교하게 조각해 놓은 것이 특이한데, 이러한
  현상은 8세기 전반기에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이 탑의 독특한 특징이 되고 있다.

  전체 비례가 아름답고 조각수법도 우수한 8세기의 걸작품으로 평가되 있다.

 

                           아래,위로 붙은 연꽃을 16송이 씩 조각하였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장항사지석조여래입상.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사지에서 출토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짐. 
         이 상은 여러 조각으로 파손되었던 것을 복원. 광배(光背)일부와 무릎 이하는 결실.
                   8세기경에 만들어진 여래입상(如來入像)으로 판단. 현존 높이 3m.

                                                                             <사진 출처 : 불교신문>

 

 여행정보
1> 명칭: 장항리사지 5층석탑
2> 위치: 경북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 1083
3> 전화번호 054-779-6394

Posted by 혜 천

  화홍문을 뒤로 두고  북동포루로 걸어간다,
  성곽 안의 가로등 불빛에, 또 한번 내 마음은
  서로 충돌이다.
성곽 안쪽 윗길로 걸을 것인가 ! 
 
 아님 성곽 바깥길로 걸을 것인가?   

 성곽 안쪽 윗길로 걷는것이 정석인것 같은데 ,
 성벽 바깥에서 조명빨 받은 성곽 모습을 봐야
 되는가 !
 어느쪽을 택할것인가 !
 헷갈리고 말았어요.

 걷기 좋은 성곽윗길을 택한 것이 사진을
 정리하다보니 잘못 잡은 산책로 였다는것을 알았죠.
 모든 아름다운 성곽의 사진은 성곽 외부에서 봐야 
더 아름다운 경치라는 사실을 알았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수원화성은 2번 둘러 봐야 제대로
볼수있다고,
한번은 성 외곽을 돌고 한번은 성곽따라
산책로를 걸어야 제대로 봐진다고 ....  

수원화성의 정문에 해당되는 장안문과 아름다운 화홍문
사이는 거리가 430m 정도 밖에 되지 않아 걷는데는
쉬운 코스  였습니다.그 사이에는 북동적대,북동치,북동포루의
 3개의 방어시설을 구경하는 코스입니다.

 그림에서 보듯이 화홍문에서 장안문까지는 성벽외부길로 걸어야 제대로 멋진 모습을
  볼수있을것 같습니다.

  아마 수원화성에서 가장 편하게 산책할수있는 성곽길을 걸을수 있는곳이 아닌가 생각될것 입니다. 북동포루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성외부길을 걸어야 됩니다. 성벽 내부로 걸어보면 그냥 지붕이있고 문이있는 시설에 지나지 않습니다.아름다운 북동포루를 보고 흥미를
끌지 못한 사람들중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북동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중 북동쪽 장안문과 화홍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포루는
 치성과 같이 성벽을 돌출시켜
검정 벽돌로 쌓았으며 나무 마루판을 이용 3층으로 구획하였다. 벽면에 포를 쏠수있게 구멍을 내어 화포를 두고 위에는  담장을 둘러  적을 위와 아래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곳이다.


 북동치 ,북동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쉽게 방어하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시설물로 치의 일종으로   주변 성벽의 바닥보다 높게 만들어서 적군의 통태와 접근을 감시하였으며 바닥에 대를 만들어 기어오르는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장안문은 서울 숭례문보다 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으로 알려져있다.
조선시대 많은 누각이나 궁궐등은 보통 팔작지붕인데 장안문은 중국 자금성 지붕처럼
 우진각지붕이다, 대국인 중국과 같은 기상으로 강대국을 표방하기 위해 거대하게 만든것 같다.

 수원 화성의 4대문 중 북쪽 문으로 정조18년(1794)에 건축되었으며 국가의 안녕을 상징하는 뜻에서 장안문이라 하였다. 이 문은 홍예문 위에 2층의 누각을 설치하였으며, 한국전쟁때 문루가 불타고 구조물이 파괴된 것을 1976년 복원하였다고 한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원형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반으로 쪼갠 독과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문의 좌우에는 옹성을 공격하는 적을 격퇴할 수 있도록 만든 적대가 있으며, 이것은 다른
 성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시설로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성곽 대문길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걸어보니  
      바라보는 경치도 좋을뿐 아니라 천정의 문양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성곽외부 도로에서 바라본 장안문의 모습을 담았습니다만 제대로 가 아닙니다. 

 장안문 옆에는 유명한 보영만두 집이 있었지만 이른 새벽이라 맛 볼수는 없어, 오후 늦은 시간 다시 찾은 곳입니다.   장안문 위, 아래, 외부,내부, 멀리서 가까이서 보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어두운 새벽녘에는 야경사진 찍는  한가지 일만 하는 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세세한 구경은 날 밝으면 둘러보는것이 좋을것 같은 곳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북포루, 서북공심돈, 화서문으로 발길을 옮겨 보겠습니다.

             여행정보 
            1> 여행장소이름 : 수원화성 장안문 여행안내소
            2> 주소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148-8
            3> 전화 : 031-228-2768

Posted by 혜 천

 

 부산에서 밤12시 버스를 타고  수원에 내리니
 이른 새벽 4시에 도착되었다. 어차피 자야할
 간에
움직이면 볼수있는 시간이 그 만큼
 많아지기에
서울이나 장거리 여행시에 택하는
 방법이다.

보통 새벽에 도착하면 동녘 해가 뜨기전까지 인근
목욕탕에
들렸다가 아침 해장국집을 찾아 아침을
먹는 것으로 그곳에서의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은 그 룰을 깨고 수원성의
야경을 볼
욕심으로
  택시를 타고 북수문 화홍문까지 갔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가까운 팔달문이 있다는 것을
몰랐으니....,
 그래서 여행전에 사전 준비가 필요한
것인가 봅니다.
 

 어느 불로그에서 화홍문의 야경사진에 매료된 기억 살아나 그곳으로 갔던 것이 랍니다.

 택시 기사님이 화홍문입니다. 하여 내리니 인적이라고는 느낄수 없어 약간은 으시시한
 느낌도 들었지만
카메라를 꺼냈는데 아뿔싸 ! 삼각대 부품이 하나 빠진것을 그때 알았으니,  이를 어쩌나 ! 낭감한일이 벌어졌지만   중요한 것은 눈에 담고 카메라로는 형상만
 담자는 마음을 잡고 앞뒤, 전후,좌우로 몇번을 왔다갔하며 둘러 봤지요.

 

수원에 갔으니 , 수원화성에 대하여 잠간 이야기하고 넘어 갑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시대 정조대왕께서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으로 인하여 뒤주속에 갖혀서 참혹하게 죽음을 당한 것은 거의 모든분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죠. 할아버지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대왕이 아버지의 고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2년10개월에 걸쳐 화려하고 운장한 성곽을 축성 한곳이 수원화성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있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있는 그 수원화성을 오늘에사 걸어 봅니다.
 수원성 5.7 km동쪽 화홍문에서 서쪽 팔달문을 거쳐 출발지 화홍문까지
 4시간을 걸었습니다.  꼼꼼시리 보고 찍으며 걷다보니 4시간이 걸린 것 입니다.  다음에는 더 적은 시간으로 돌아볼수 있을것 같습니다.

 

  수원화성은 평지성 이라 걷기가 수월하고 40여개의 성 시설물이 있어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보며 걸을 수 있습니다.  수원화성 북쪽에 장안문, 남쪽에 팔달문, 서쪽에 화서문,동쪽에 창룡문, 이 4개의 관문 사이에는 적의 동태를  파악 하는 공심돈을 만들었고, 서장대,동장대 2곳을 만들어 군사를 훈련시키는 곳도 만들어 놓았어요.

 이것 저것 볼거리가 아주 많은 유적지라 1997년 12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된 곳입니다.  

   북수문을 화홍문이라 하는 사실은 그곳 에서 알게된 사실 이였습니다.
  아치형 수문이 7개라는 사실도 그곳에 알았구요, 한컷 찍으러니 삼가대없이는 찍을수가
  없을것 같은데 무리를하여 
찍어 본다고 iso를 높이니 노이즈가 심하게 생겼지만 어쩔
  방법이 있어야죠.

 수원화성을 한바퀴 돌고나니 북수문으로 흘러 내리는 물은 방화수류정에서 흘러 온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건 나중에 
알게된 일이었지만,  분명 물길의 발원지가 있을 것인데 북수문이니  북수문의 윗쪽에 발원지가 있을것이고 남쪽에는 남수문이 있을것이다라고 생각하였는 그생각이 맞았어요. 그 물줄기가 수원천이랍니다. 

 화홍문은 석교로 7개의 홍예수문이 설치되어 있고, 7개의수문의 수문중 ,가운데 수문을
 눈여겨 보시면 양쪽 수문들보다
넓고 크게 되어있죠. 왜 일까 ? 정확하게는 모르겠고  양쪽보다는 가운데로 물이 빨리 많이흘러야 될것 같은 생각에 그렇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되었습니다.

 홍예문 위로 올라 가봤죠.
사람이 중앙으로 다닐수 있게 만들어 놓았어요. 성벽에 바싹붙여 누각을 세웠놓았으며, 
누각의 면적은 잘 모르겠지만 팔작지붕 형식이여서 아담하고 정겨운 누각 이였답니다.

 비가온 뒤 물의 양이 많으면 물보라에 무지개가 생겨 화홍문을 더 아름답게 하는데 이를 화홍관창이라하여 수원팔경에  속한다고하니 그런 광경을 한번 보고 싶어 지기도 했지만 그때 가 볼수야 없죠.
 

오른쪽 높은 언덕 조명을 받고 있는것이 무엇인지 몰라 간판을 찾아다녔다. 동북각루라고 설명되어 있다. 동북각루를 보고 왼쪽으로 방향을 잡을것인가 , 아님 마지막에 와서 볼것인지를  고민하다가  왼쪽으로 돌기로 하고 마지막에 동북각루를 보기로 마음먹고 북동포루로 향했다.  내일은 북동포루에 대해 이야기 엮어 가겠습니다.     

             여행정보 
             1> 위치: 경기도 수원시 북수동 190
             2> 전화 : 031-251-4435            

Posted by 혜 천
설날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밀양엘 다녀왔다. 
부산에서 가까운 밀양은 보고 배울 것이 많은 문화도시다.
관혼상제에 대해 하나라도 더 알고 싶어 하는것이 나이를
먹는다는 증거 일까?

밀양 영남루 바로 앞에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시조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있고 이곳에서 매년 제례를 지낸다니
종교를 떠나 참 좋은 일이라 생각되고 또 영원히 보존할
일이라 생각되었다. 그곳이 천진궁이였다.

천진궁은 1665년 현종6년에 건립되었으며 이 건물은
역대 왕조 시조 위패를 모신 공진관의 부속건물로 사용되었으나,
1722년 경종2년부터 공진관 대신 위패를 보관하며
객사의 기능을 하던 곳이었다 한다.

일제시대에는 헌병대가 이 건물을 감옥으로 사용했으며 , 이는 일제가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말살하기 위하여 역대 왕들의 위패를 땅에 묻고 감옥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민족 수난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할수 있는 역사 현장이기도 한곳이다
.  


      영남루에서 마당 건너 앞을 보면 만덕문이 보인다.
      만덕문을 들어서면 천군궁 현판을 가진 건물이 바로 역대 왕조의 시조를 모신 천진궁이다.
   

      

     
   1952년 단군 봉안회가 생겨 천진궁의 남쪽을 향해 중앙에 단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왼쪽 벽면에 부여시조왕, 고구려 시조왕,가야시조왕,과 고려태조의 위패를 모시고
   오른쪽 벽면에 신라시조왕,백제시조왕,그리고 발해고왕 마지막에 조선 태조의 위패
   모셔져 있다. 매년 봄,가을 로 어천대제와 개천대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각시조 위패에는 각왕조 시조 王位라고 쓰고 오른쪽에는 歷(기간)  그리고 외쪽에는 
        合 10년 이렇게 위패가 만들어 있다.    예로들면 가락시조왕위 (駕洛始祖王位)
        오른쪽엔 歷491年 오른쪽엔 合10王으로되어있다 가락국은 491년 존속했으며
          10명의 왕이 계셨다는 뜻입니다.
                       
 
 


                                   석상 과 비문 
           * 비문- 삼신제왕 ( 삼신할미) , 칠원성군(북두칠성), 태산노군 ( 노자를 지칭)
           * 석상- 단군왕검이 아닌가 싶다
.
 
      
      이렇게 대한민국의 건국시조 단군으로부터
      부여국,갸야 , 백제, 고구려,신라 발해,고려 그리고 조선 이 8 왕조가 우리의 역사이며
      하나라도 잊어버리고 등한시 하면 우리의 역사는 단절되는 것입니다.
     
      이런 곳은 좀더 활성화하여 역사교육 장소로 활용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여행정보
     1. 위치 :  경남 밀양시 내일동 40번지 (밀양영남루)
     2. 전화 : 055-359-5590


Posted by 혜 천

          

남도 지방 중에서 대나무가 제일 많은 곳이 담양이다.

대나무가 많기 때문에 죽 제품이 발달되어 

옛부터 전국에 그 이름이 알려진곳이기도 하다.

푸른대숲에 하얗게 내려 앉은 눈 길을 걸어 도착한 곳이
 채상(彩箱)을 만드는곳 이였다.
 
채상이라는게 뭔지 아는 사람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부터 든다.
 나도 나이 많은 축에 들지만 처음엔 채상이 뭔지 몰랐다.
 건물 입구에서 현품을 보니 흔히 시골에서 본 대나무 고리짝이
 진화된 것이라 생각 되어졌다.
대나무를 재료로 하여 엮어 짠 고리의 일종이라고 보면 맞을것이다.

입구에 대나무 고리짝 하나가
  유리상자에 넣어져  보관되는
것을 보니 그 원조가 확실한것 같다.        

  담양죽제품시장은 1980년 프라스틱용품이 생활에 쓰여지기 이전약 300 년동안 우리선조들과
 함께해온 우리의 귀중품 보관 박스였다고하면 맞을련지,
조선시대에는 중국일본 몽고등에서도 알아주는 동양최대의 죽물시장이였다고 하지요. 90년대부터는 값싼 중국제푼이 들어오면서 그
나마 명맥을 이어오던
죽물제품들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고 합니다..           

  채상 (彩箱 ) 이란 글 그대로 해석하면 색을입힌 상자를 말하는데

 대나무를 얇고 가늘게 쪼개어 빨강, 노랑, 파랑 색깔을 채색하여 짜만든 상자를
 채상이라  한다.

채상(彩箱)이란...

대나무를 얇고 가늘게 쪼개어 여러 색깔로 물드려 짜 만든 것을 채상이라 한다.

보편적으로 상자형 제품이 많으나 반짇고리, 베게, 부채, 방침, 색실상자, 보석함 등 여러가지 무늬의 다양한 제품이 만들어진다. 원래는 채죽상자(彩竹箱子)로 불렸으나 줄여진 이름이다.


채상의 역사(歷史)
고대 죽제품의 기록은 후한서(後漢書)에 나타나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경남 창원시 다호리무덤(기원전 1~2세기) 에서 죽협이 출토되었고 평안남도 대동군 남정리의 낙랑유적 (기원후 1~3세기) 에서 씨대를 세우고 댓살을 엮어나가는 바구니짜기와 동일기법의 채화칠협(彩畵漆篋)이 발견 되었다. 이러한 죽제품은 주거생활에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으나 플라스틱 제품의 발달로 차츰 수요가 줄어들어 민속예능이 사라지고 있다.

 채상장 인간문화재 전시관이 위치한 담양군은 대나무제품이 가장 발달한 곳으로 이곳 출신 서한규옹이 중요무형문화재 제 53호 채상장(1987년 1월 5일 지정)으로 지정되어 장인의 뿌리를 이어가고 있다.  (출처:채상전수관)


 

채상의 제작과정(過程) 및 설명(設明)

대나무 채취 -> 물담그기,대다듬기,쪼개기,훑기 -> 염색하기 -> 채상짜기로 크게 구별된다.

1)대나무 채취(採取)
   채상을 만드는데 쓰이는 왕대나무는 키가 크고 곧게자란 2~3년생이 적합하다.
   대는 황토밭에서 식생한 것으로 동지 무렵에 채취한다.
 
2)대나무 물담그기, 다듬기, 쪼개기, 훑기
   채취한 대의 마디를 잘 다듬어서 만들 제품의 크기에 맞추어 쪼갠다.
  작업은 대나무가 마르기 전에 작업하여야 하고 대나무 상태에 따라 물붙이기, 죽뜨기,
  조름빼기, 대오리 훑기가 끝나면 두께 0.1~0.2mm로 얇아지고 내피와 외피로 구분 된다.
 
3)염색(染色)하기
   채상의 특징은 아름다운 색상과 문양에 있으므로 염색이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나라 전통염색 기법은 식물성 염료를 사용하는 천연염색으로 하여야 하나 재료부족
   으로 일부는 화학염료를 사용하고 있다. 염색으로는 노란색 계열의 치자물, 자주색
   계열의 마젠다와 소목을 사용하며 녹색계열의 화학염료를 사용하고 있으나 최근에 쑥과
   잇꽃(홍화)의 천연염료를 사용하고 있다.
 
4) 채상(彩箱)짜기
   상자를 짜기 위해 씨대와 날대를 놓고 바닥잡기를 한 다음 문양에 맞춰 세오리뜨기로
   넣으면서 대오리를 넣고  문양의 짜임을 생각 하며 작업해야 한다.
    어느정도 짜지면 태대를 넣고 접기하는 것을 여러번하여 상자짜기를 한다. 작업이
    완료되면 마무리 손질하여 상품화 한다.
                                                                                              (출처 : 채상전수관)

 이 상자는 요즈음은 아니지만,
 처녀의 혼수감을 담거나 여인의 받짇고리 로 사용되거나
옛 선비들의 궁중야근 때 입을 옷릉 담아 가는데 쓰였다고 도 한다.
임금이 승하 할때 서울로 봉물을 담아 보내는 데도 사용했다고 한다. 

 

위(上) 상자는 예부터 쓰든 대나무 고리짝     (下) 아래가 요즈음 사용되는 채상    

서한규 옹과 딸 서정민씨 두명이 삼합 하나 만드는데  보름정도 걸리는데 이 삼합 하나가 200만원 정도 하니 보통사람은  잘사지 않고 부자들은 간혹 사지만  이 채상에 대해서 아는 대학교수들이 사간다고 한다.   

         
   대나무를 얇고 가늘게 쪼개어 색을 입힌 상태 

        편죽은 10-20가닥의 대오리를 완손 바닥에 펴서 쥐고 오른손으로는 준비된
       채색 대오리를 1-5가닥씩
  걸러가며 엮는다고 한다.

      담양에서 죽물과 함께 생을 살아온  서한규옹은 1930년 벌뫼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죽물을 다루는데 눈썰미가   남달랐고 손재주가 뛰어 났다. 지금까지
    서한규옹은
 1982년 제7회 전승공예 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수상한바 
    있고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 53호로 지정되었다.

  여행정보
         담양군(담당부서 : 문화관광과 )연락처 : 061)380-3154 
         채상장 전수관(061-381-4627

Posted by 혜 천


31국도 일부 구간, 부산해운대에서 울산까지 바닷가를 따라
만들어진 너무나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라는 것은
별도로 설명을 하지않아도   모든분들이 인정하는 곳이랍니다.

이름난곳만 대충 열거 해봐도 아-하실겁니다.
송정해수욕장,기장대변항, 칠암아나고횟촌,죽성리,
일광해수욕장, 진하 명선도와강양항, 간절곶등등 아주많아요.

 
진하해수욕장은 울산시 울주군에 위치한 풍광이 좋은곳이
였어 울산이나 부산사람들이  자주 찾는곳이죠.
울산시내에서 20분, 부산에서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휑하니 다녀올수있는거리입니다.

근래에 가지 못한사이 진하와 강양항사이 아름다운 다리가 놓여
볼거리를 한가지 추가한 곳입니다.


진하해수욕장은 울산에서 동남쪽으로 24km거리에 있는 길이 1km,
폭은 300m의 해수욕장으로 수심이 얕고, 넓은 모래사장과 소나무 숲이 장관이며
앞바다에는 명선도가 있어 주변의 소나무 숲과 함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부산 해운대,송정 일광해수욕장으로 연결되는 해수욕장으로 96,000평방미터의
 넓은 백사장이 돋보이고, 사진작가, 윈드 서핑 애호가, 바다 낚시꾼 등 연중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 합니다.   

          


강양항은 울산 울주군 온산읍 강양리에 위치하고있으며 ,명선도는 울산 울주군 서생면 진하리에 있습니다. 진하해수욕장 은 울산 울주군 서생면 화정리 307-2번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야강 또한  울산 울주군 서생면 화정리에 있어서 강양항으로 흘러내리는 강입니다.




 
     강양항 앞 마을의 모습과 회야강하구 강양항 앞바다에 설치되어 있는 등대 또한 멋있습니다.





  여름철에 매미가 많이 울었으므로 ‘우는 매미의 섬’이라는 뜻에서 명선도(鳴蟬島)라고 불렸다는 설도 있으나 예전부터 ‘이름난 신선의 섬’이라는 뜻의 명선도(名仙島)나 ‘이름난 산의 섬’이라는 의미의 명산도(名山島)라고도 불려왔던 만큼 그 유래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명선도의 일출을 찍지 못했습니다.  

명선도, 해무와 어선, 갈매기의 하모니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의 명선도는 맞은편의 강양항이나 진하해수욕장에서 보면 바다를 향해 머리를 삐쭉 내민 거북처럼 보이는 작은 섬이다. 겨울철에는 이곳 바다에 해무가 자주 발생해 소나무가 돌출한 명선도와 갯바위, 파도, 멸치잡이 어선, 태양이 어우러진 풍경이 장관을 연출합니다.

 바닷물이 끓어오르듯 해무 자욱한 새벽 바다에는 귀항하는 멸치잡이 배를 따라 갈매기들이 어지럽게 날아든다. 하늘과 구름은 붉게 물들고 바다에는 배와 어부, 갈매기들이 검은 실루엣을 드러내며 황홀한 장면을 연출할때 한컷 찍는기분이 어떨까요?


여행정보

1> 위    치 : 울산 울주군 서생면 진하리 
2> 전    화 : 울산광역시 울주군 문화공보실(052-229-7118)
                  울산시 문화공보과052-229-7076
                  울산시 관광과  관광과 052-229-3852
3> 홈페이지 : (울주군) http://www.ulju.ulsan.kr
4>찾아가는 길  : 1) 경부고속도로 언양 IC -> 울산->남부순환도로->14번, 31번 국도 이용
                        2) 부산에서 31번국도 또는 14번국도 ->남창에서 1028지방도 이용
                        3) 울산에서 온산공단을 지나서 서생면 방향으로 갈 수 있고,
                            해운대 방향 14번 국도를 이용하여 울산온천 방향으로 진입하여 갈 수 있다.

5>현지교통 : 1) 울산공항에서 1402, 412번을 타고 공업탑에서 하차하여 1715, 715, 405번으로
                          갈아타고 진하 하차          
                   2) 울산역에서 1104, 1114, 1401, 307, 317, 327번을 타고 공업탑에서 하차하여
                           1715, 715, 405번으로 갈아타고 진하 하차
                   3) 시외버스터미널에서 1715, 715번을 타고 진하에서 하차

 6>현지숙박 : 민박/문의-울산시수협 052-268-8005
                    
 

Posted by 혜 천

2,000년전 외국인이 첫 입국한 항구 진해용원 포구.

지금은 생대구로 유명한곳 진해용원이지만
머나먼 인도땅에서 가야 김수로왕의 왕비가 되기위해
돌배를 타고 도착한 가야의 땅 용원입니다.

지금은 조그만 포구이지만 2,000년전에는
외국인이 첫 입국한곳이니 국제항이라할수있죠.

몇십년전부터 수없이 진해용원을 다녔었는데
역사의 눈이 없어 지금껏 지나친곳 이였습니다.

진해용원 버스정류장 옆에 
유주정과 망산도가 있었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보면 망산도의 지명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곳 진해 용원이 유서깊은 곳이라해도 지나칠 것이 없는 곳이라 생각됩니다.

수로왕이 왕이 된지 7년이 지나도록 왕비가 없자 신하들이 왕비를 맞이할것을 청하였는데,
수로왕은 왕비는 하늘이 정해줄 것이라고 말하고 유천간을 현 진해시 용원동 앞바다에 있는
 작은섬으로 보내 기다리게 했는데, 그섬이 지금의 망산도라고 합니다.

어느날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색의 돛과 기를 단 돌로 만든 배가 허왕후 일해을 태우고
나타나자 수로왕이 직접 나와 허황후를 맞이하여 혼례를 올리고 150세가 넘도록 장수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허황후 일행이 타고 온 돌배가 바닷속으로 뒤집혔는데, 그곳이 바로 망산도에서 동북쪽으로 70m 쯤되는 곳에 있는 바위섬인 유주암이라고 합니다.
 
망산도와 유쥬암은 삼국유사와 신동국여지승람 김해돟부조에 관련 문헌 기록이 전하는 전승기념장소로 1988년부터 경남기념물 제89호로 지정보존관리하여왔으며, 학실한 문헌기록이 전해지는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문화재입니다.

또 망산도에는 패각과 동일신라시대 고려시대에 제작된것으로 도질제및 연질토기 파편이 확인되고 있으며,이로 미루어보아 부산지역에서 보기드문 제사유적일 가능성이 높다는점에서 고고학적으로도 매우가치있는 문화재로 평가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곳이라면서 딸랑 안내간판 한만 있을뿐 , 관리관청은 말뿐인 관리를 하고 있는것 같이 보입니다.  2007년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경상남도에서 부산광역시로 편입된곳이라고 안내간판에 기록해두었으나 관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안아 보였습니다.

유주암은 어디있는지, 위치도 없고, 70m 정도 떨어져있는곳의 바위섬이 유주암 같으나 아무른
안내판도 없었다.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었으면 탁상행정에서 벗어나 알차게 관리를
 했으면 좋을듯 합니다.      

      진해용원 어시장입니다. 이 어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마을의 초입 바닷가에 망산도가
      있습니다.

 유주정이라는 정자옆에 부산과 진해,마산,창원으로 운행되는 버스들의 종착 정류소입니다.
 정류소 앞 유주정이있고, 그 앞 바닷가에 망산도가 있습니다.

     망산도는 조그만 섬입니다. 썰물때라 걸어서 들어갈수있습니다. 



    이곳의 바위들은 다른곳에 있는 바위와좀다른 느낌이였습니다. 바위가 거북등처럼 무늬가
나있습니다.

       예전에는 조그만 암자가 하나있었다는데 지금은 공터로 남아있습니다.
       



 망산도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면 조그만 바위가 보입니다. 그곳이 돌배가 뒤집혔다는 유주암
  입니다. 그곳까지 가보니 바위 2개로 이루어진곳 유주암이였습니다.

 이곳 유주암도 망산도 바위와 같이 거북등처럼 거미줄같이 갈라져있는것을 볼때
 망산도와 같은 재질이 분명하다고 할수있었습니다.


 인근에는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청이 시행하고있는 공사가 한창이고, 가덕도 부산신항 컨테이너
 하치 장비들이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가야국 왕비가 이곳에 첫발을 딛고 내린 유서 깊은곳 이지만 웬지 초라해보였으나  자연상태
그대로의 모습도 좋아 보였습니다. 돈을 들여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더덕더덕 붙여 놓는
것보다 나을수 있다고 보여지기도 했습니다. 

진해용원 생대구를 사려 오거나,  시원한 대구탕을 드시가면  김해허씨 시조 허황옥이 처음 
발을 딛고 가야땅에 입국한 역사적인 장소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여행정보 
 1>위치 : 부산광역시 강서구 송정동 산188번지 (망산도)
 2>전화 :  051-970-4000
             강서구청 문화공보담당 051-970-4072

Posted by 혜 천

율리 휴양림 펜션에서 자고 아침일찍 진천 보탑사를
향하는 길목  청원 초정약수터가 눈에 들어 잠시
들러보기로 하고 차를 세웠다. 전날 저녁에도 
천연 사이다를 마셨는데 하면서...내렸다.

초정 (산초나무 우물 井)
이라는 명칭도 알고
보니이곳의 물맛이 후추처럼 톡∼ 쏘는  맛이라는 뜻이다.


옛 선조들은 지명을 지을때도 특성과특색에 맞게 지었다는
사실이놀랍다. 물맛이 산초처럼 톡 ∼ 쏘는맛에 연유하여
초정리라는 이름을 붙인것 같다.

초정약수물을 사용하여 목욕탕으로도 쓰고 ,천연사이다를
생산하여
팔기도 하는곳으로 건물 옆에 일반시민이
 이용하도록 수도꼭지를
설치해두었다.
 

 

충북청원 초정약수는 세계3대 광천수 중 하나로 약600년전에 발견되어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동국여지승람에 " 초정약수는 청주고을 39리에 있는데 그 맛이 후추 같으면서 ,차고
그 물에 목욕을 하면 병이 낫는다. 세조와 
 세종대왕이 일찍이 이곳에 행차하여 머물면서
병을 치료 했다고 한다. 

 

 




지나다가 맛본 이곳은, 원탕근처 초정리 여러 식당에서 약수를 끌어 올려 일반인들에게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톡쏘는 맛은 그대로 인데 주위가 깨끗하지를 못한것이 좀 그렇다. 수질검사 성적서 붙여 놓고 있긴한데

이곳에는
초정 약수를 알리는 동상이 세워져 초정약수 문화관광 중심지로 탈바꿈 시키려나 보다하고 생각되기도 한다.  

 

 

           일제때 인 1912년 일본인이 채취하여 청량음료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
         지금은 기업에서 천연사이다.
천연탄산수미네랄워터 등을 만들어 시판하고 있다. 



 초정약수는 고혈압,당뇨병,위장병,피부병,안질 등에 효험이 있는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약수의 성분은 단순탄산
과 중탄산이 함유되어있고 각종 미네랄이온과 천연탄산까스가
 풍부한 탄산수라 한다,

         세포를 자극하여 몸의 기능을 활성화 하고 혈압을 정상화시키는데 중요한 구실을 히는
         성분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러나 초정약수의 1일 권장 음용가능량을 1000mml정도 마시면
         좋다고 한다 .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건강을
해칠수도 있다고 한다 . 약수라고 다 좋은것은 아니다.   
          과하면 부족한 것보다 못하다고 했지요.
 

                 탄산수의 매력은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힘들지만

일반적으로 소화가 잘 안되는 사람들, 또는 환자, 또는 개인적 취향에 따라

속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탄산을 원하되 첨가물이 들어간 음료보다는 생수로

즐기고 싶을 때 많이 선택하는 편입니다.

  

여행정보

1>위치 : 충북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

2>문의 : 청원군 내수읍 사무소(043-214-0601)

3>교통안내 : 1) 청주 -> 증평방면 36번국도 -> 마산리 -> 511번 지방도 -> 초정리
                    2) 중부고속도로 증평IC->용계리 -> 내수리 -> 511번 지방도 -> 초정약수터
                          현지교통 : 내수읍에서 초정리까지 마을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운행. 15분 소요.
                    3)  현지숙박 : 초정약수스파텔(043-210-9900) 및 기타 여관 다수. 

4> 주변명소 : 운보김기창화백 생가,  구녀성, 옥화9경, 손병희선생 생가



 

 


Posted by 혜 천

 옥천읍 문정리 구읍 정지용 생가 가까운 곳에 
 옛 소재지로 관아와 향교가 있었고 양반들이 주로
 모여 살았던 곳이다.

 
전통 한옥 형태의 주택이 남아 있지 않아 아쉬운
  가운데 춘추민속관이 있어 좋았다.

 춘추민속관은 향토시인 정지용의 생가와 문학관에서
 불과 200여 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다.

1760년(영조 36년)에 지어져 약 2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한옥(55칸)에 농경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춘추민속관이 있는옥천구읍은 1900년대 초까지
충청북도 옥천의 중심지였었다. 옥천음축향1리와 3리, 상계,하계,문정리,교동리등 5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1900년대 초 주민들의 반대로 역이들어서지 못한것이 쇠퇴의 길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05년 현재의 옥천읍내에 옥천역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레 주요시설과 인구가 밀집하니
 중심지가 되었고, 옥천구읍은 말그대로 구읍이 되고 말았지요. 

그래서 옥천구읍에 있는 춘추민속관이라고 합니다. 

 

        이 고택의 상량문에는 숭정기원후사병진십이월 (1856년 12월 -철종7년) 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는데 숭정(崇禎) 은
중국 명나라 말기 황제 의종의 연호로 건축연도를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전해 오는 말로는 흥선대원군이 자주 머물렀다고
 하며 괴정 오상규님이 건축하고
           그후손 오윤목(재정국장)국장이 증축한 것으로 밝혀져 귀중한 민속자료로 그 가치를
 
인증받아 복원되어 옛 모습을 되살리게 되었다.

         본래 규모는 알수 없으나 현재 #자의 안채 와 별채 ,곳간과 뒷간 49칸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마당에는 정승집의 상징인 회화나무( 선비나무,백사목)가 수백년 세월동안 숨쉬고
         있고 옛 선비들의 마음가짐을
담고 있는 극념재(克念齋) 라는 현판이 남아 있다.

 

      **  회화나무 또는 백사목 **                      

       일제때 세운  명치천황 비          

               *남 여  화장실의 재미있는 표시                                           

           지금은 문화관광부,충청북도, 옥천군 후원으로 정택희님이 새롭게 복원하여 전통한옥,
         생활문화체험관으로
고택민박, 전통혼례,한옥마실,음악회, 고택밀주담그기,약초담그기,
         등으로 운영하고 있다.

          곳간 여기저기 술익는 냄새가 진동한다.
           옛 선비들이 즐겨 마시던 가양주의 전통을 이어받아 고택밀주를 만들어 팔기도
 한다,
           근래에는 마지막 황손 이석씨와 도올 선생도 자주 찾는다고 한다.

 

 

                                              * 한잔 씩 맛을 보며 여행의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 

 수집한  향토 민속유물들을 구경할 수 도 있는 전시관,  효소만들기와 한옥짓기 등을 체험하게 할 수 있는 안채와 전통한옥 민박(전통한옥체험관)을 할 수 있는 별채, 야외공간으로 나뉜다. 주말에는 목단꽃 실내공연장에서 공연도 열린다.

 춘추민속관도 좋지만 옥천은 정지용의 향수 30리의 시발점 옥천구읍이 좋고
 멋진 신세계로의 길은  정지용생가 육영수여사 생가 ,향교 등 볼꺼리가 있고
시인의 시정 세계를 따라가는 여정이기도 한 여행이 좋다. 


여행정보

1> 위치 : 충북 옥천군 옥천읍 문정리 6-3
2> 문의  : 춘추민속관 ☎043--733-4007 , 010-3174-3307
3> 찾아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 옥천 ic ↔ 7군도 ↔ 수북리방향 2km지점
4> 이용시간 : 관람시간 10:00~22:00 (  관람소요시간 : 약 2시간 ) 

Posted by 혜 천

보길도의 동쪽 끝 막다른 깍아지른 해안 절벽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1689년 제주도로
유배가던 중 풍랑을 만나 상륙 했을때 자신의처지를
 한탄한 한시를 해안절벽에
새겨 놓은것이 후세에
"우암송시열 선생 글씐바위"  유적지가 된 곳이다.

우암 송시열선생의 글씐 바위가 있는 지도 모르고
보길도에 왔는데  여행중 여행 안내책자를
들추니
 선생의 유적가 있는 것을 알고 횡재를 만난 여행코스였다.

바위절벽에 암각되어 있는것 뿐이니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은
실망을 하며 돌아간다. 하기사, 먼길을 걸어 들어 왔는데
주위에 볼것은 글 몇줄 새겨 놓았는데 , 글씨도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되어 있으니 그럴수 밖에 없을것이다.

이곳을 재미있게 볼려면 우암송시열선생과 고산 유선도 선생 그리고
4색당파 싸움에 대해 사전에 알고 가면 재미있게 볼수있는곳이다.

앞으로 여행갈 사람을 위해 좀 상세히 적어 봅니다.



우암 송시열 그는 누구인가 ?
우암 송시열 글씐바위가 있는 이곳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가
 은둔생활을 하며 ‘어부사시사’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곳으로,
 정치적 사상이 남인과 서인이라는 전혀 다른 길을 간 두 사람이
 보길도라는 섬에 남긴 인연을 어떻게 설명 해야할까?

고산과 우암은 각각 남인과 서인에 속하며 당시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정적관계였다. 또한 두 사람은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었으며 같은 시대인으로는 드물게 80을 넘게 살면서  다섯 임금을
 섬겼는데 두 사람간에 벌어진 치열한 정치적 논쟁은 당시의 극명한 정치적 상황을 말해준다.

나이로 본다면 고산은 선조 20년(1587년)에 태어났고 우암은 선조 40년(1607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고산이 20세 더 많은 셈이었다.

   이 글을 쉽게 이해 할려면 아래 4색당파시절의 당쟁구조도를 먼저 보시고 글을 읽으시면
    도움이 될것 입니다.



효종이 사망했을 때 윤선도 등 남인들이 3년 상을 주장하는 것에 비해 송시열은 기년 복(1년 상)을 주장한다는 것이다.이때는 1년 기복을 주장한다는 것은 정통 성리학을  부인한다는 해석도 가능한 것이어서 논쟁의 소지가 다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이후 남인들은 서인에 대한 반격의 정치공세로 예송논쟁을 제기하고 나서 예송논쟁은 뜨겁게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예송논쟁이 무어냐 하면 
상을 3년상으로 하느냐, 1년상으로하는냐는 문제를 놓고 남인 윤선도와  서인 송시열 간에
 정치적 논쟁을 사활을 건 문제였다.
  
인조의 부인이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당시 집권당이 서인들이었기 때문인지 서인들이 주장하는 1년 복으로 정리되면서 서인들이 승리하였다.

적통에 대한 논란이 매우 예민할 수밖에 없듯이 남인들은 정치적 대 반격을 가하는데 예송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비화시키며 상소를 올린 인물이 고산 윤선도였다.

시간은 흘러 현종이 집권을 하고 있을 때 효종의 비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을 떠나므로 인해 발생한 2차 예송논쟁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남인들로 인해 서인들이 정권에서 몰락하고 남인들이 정권을 잡게 된다.
 
이는 철저하게 서인들로부터 탄압 받았던 남인들의 서인들에 대한 복수이기도 하였으며 일종의 만년 야당인 남인이 모처럼 정권을 잡는 것이기도 하였다.

 예전의 정치판이나 지금의 정치판이 조금도 다른것이 없음을 느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후에도 서인들과 남인들은 또다시 집권을 놓고 쟁패를 거듭하는데 서인의 영수로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송시열도 숙종 때에는 예송논쟁으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 된다. 

 막강한 장희빈에게 도전한 우암송시열,그는 성리학자의 외골수 였나?
숙종 시대에는 장희빈이 낳은 아들의 적통을 놓고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싸운 시기이기도 하였다.
숙종은 서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희빈을 통해 얻은 장씨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정하는데 이 원자에 대한 정통성을 정면으로 제기하고 나선 인물이 송시열이었다.

당시 왕권에 대한 정면도전은 죽음을 걸어야 했던 것으로 송시열은 공신에 대한 예우로 죽음은
 면하고 제주도로 유배 길에 오르지만 결국 그는 다시 국문을 받기 위해 올라오던 도중 사약을
마시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가 제주도 유배 길에 평생 정적으로 상대해야 했던 고산 윤선도의  보길도에 들렀던 것은 우연이었는지는 몰라도 참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없다.
 
송시열은 이곳 보길도의 동쪽해안 암벽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여든 세 살의 늙은 이 몸이 거칠고 먼 바닷길을 가노라 한 마디 말이 어찌 큰 죄가 되어
세 번이나 쫓겨나니 신세가 궁하구나 북녘 하늘 해를 바라보며 남쪽 바다 믿고 가느니
바람뿐인데, 초구에는 옛 은혜 서려 이 감격한 외로운 속마음 눈물짓네” 
                                                             ( 위 암각 사진과 아래 비문 참조 )




 고산 윤선도는 현종 12년인 1671년 보길도에서 85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고, 송시열은 숙종15년(1689년) 82세에 사약을 마시고 죽는다. 둘은 서로 다른 당파로 인해 치열하게 싸우다가 자연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줌 흙으로 돌아가는것을 정치판 숙적이 뭔지 요즙 정치인들 이 글 읽고
좀 느꼈으면 좋으련만...

전남 보길도 우암 송시열의 글씐바위의 암각이 이런 사연을 가진곳이다. 그런데 보길도 여행에서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많은것 같아 안타까웠다.
 

Posted by 혜 천

  

  부산 수영동에는 독도 수호의 선구자인 안 용복이 근무했던 
 경상좌수영이 있던 역사의   현장인 수영사적공원이 있다.
 그 사적공원내에 안용복장군의 사당이 있으며 그 인근에
 안 장군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안영복 장군은 조선 숙종때 동래출신(현수영구수영동)
어민으로,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의 수군인 능로군이었다.
당시 왜인들이 우리의 울릉도와
 독도를 죽도라 부르면서
 자주 침범하자, 동료와함께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땅임을 확인시키고, 일본의 에도막부로
부터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받아 온 사람이다.

 그는 어부였다.  울릉도와 독도 수호에 큰 업적을 세워 후세 사람들에 의해
 장군이란
 칭호를 받으신 분이다. 국가에서 장군으로 임명된것이 아니고
 백성들이 안영복의
업적을 높이사 장군으로 부른것이다.
 그러니 참다운 장군이라 아니하겠는가!

 그래서  후세에 오래 기리고자 수영 사적공원에 사당과 동상을 건립하여 추모하고 있다

 

                  

   안영복 어린시절은 ?                                  

   동래부 출신으로 홀어머니 아래에서 엄하게 자랐으며 어릴 때부터 부산의 왜관(倭館 지금 고관
    옆)을 자주 출입하면서 일본말을 배워 일본인으로 오해받을 만큼의 일본어 실력을 쌓았고 장성
    하여서는  수군에 들어갔었으나 곧 그곳을 나와 어부로써 생활했다는 정도로 매우 소략하다.  

 

   안용복의 어부생활가 애국심은 자발적인 마음에서 발로된 점 ! 
 오늘 이야기하려는 안용복 역시 동래어민 40여명과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고기를
  잡기 위하여 침입한 일본어민을 만나 이를 힐책하다가 그의 오랜 친구였던 박어둔(朴於屯)과
  함께  일본으로 잡혀갔고 .  이때 호키주(百耆州)태수와 에도막부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농간을
 부리는 것이  심함을 밝히고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확인하는 문서를 받아냈다. 

 그러나 돌아오던 중 대마도주에게 잡혀서 문서를 빼앗기고 구금되었다. 
 대마도주는 울릉도를 차지하기 위해 다케시마(竹島)문서를 위조하여 같은 해 9월 사신을
 동래에 보내어 안용복을 송환하는 동시에 예조에 문서를 보내 조선의 어민이 일본 영토인
 다케시마(독도)에서 고기 잡는 것을 금지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울릉도 독도 박물관 앞 에서 안용복장군 추모비  

    

   안용복의 두 번째 일본행은 1696년 봄에 10여명의 어부들과 울릉도에서 어로작업을 하다가 마침
   출어한 일본어선을 발견하고 송도(松島)까지 추격하여 그들이 우리의 영토에 들어와 고기를 잡는
   것은 침범행위임을 분명히 밝히고 추궁한 때였다. 

  또 추궁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껴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島監稅官)이라는 가짜 관리직으로
 스스로를 밝히고 일본 호키주에 가서 태수에게 남의 영토를 침범한 사실을 항의하고 사과를 받아낸
 후 귀향하였다. 

 그가 얻어 낸 결과가 훌륭하였고 관리를 사칭한 것도 도리어 애국심의 발현이었다는 사정이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그는 나라의 허락 없이 거짓관리행세를 하여 국제문제를 일으켰다는 죄명으로 조정에 압송되어 사형까지 논의되었고 이전에 대마도주에게 빼앗겨 증명할 수 없었던 문서의 진위여부까지 의심받게 되었다. 

 그러나 남구만의 간곡한 만류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가 귀양을 간 다음해인 1697년 대마도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하고 울릉도를 조선 땅으로 확인한다는 막부의 통지를 보냈으나 안용복의
 죄는
  풀리지 않았다.              

  안용복의 용기 있는 기개로 울릉도에 대한 일본과의 마찰은 철종 시대까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안용복이 비변사에서 조사를 받을 때 진술한 그의 말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한다.
  누구의 말도 아닌 본인의 말을 통해 안용복이란 한 어부가 조상 대대로 이어받은 우리의 땅을
   어찌 생각하였는지 느꼈으면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안중근의사라고 해도 나쁘지 않을 정도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애국ㄱ자의 발로라고 봐진다.  

 “저는 본디 동래에 사는데, 어미를 보러 울산에 갔다가 마침 뇌헌스님 등을 만나서 근년에
  울릉도에 왕래한 일을 자세히 말하고, 또 그 섬에 해물이 많다는 것을 말하였더니, 뇌헌 등이
  이롭게 여겼습니다.

  그 시절의 울릉도와  독도현황을 알수있네요!
 드디어 같이 배를 타고 영해 사는 뱃사공 유일부 등과 함께 떠나 그 섬에 이르렀는데, 
 주산(主山)인 삼봉은 삼각산보다 높았고, 남에서 북까지는 이틀길이고 동에서 서까지도
 그러하였습니다.

 산에는 잡목.매.까마귀.고양이가 많았고, 왜선도 많이 와서 정박하여 있으므로 뱃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습니다. 

 제가 앞장서서 말하기를, ‘울릉도는 본디 우리 지경인데, 왜인이 어찌하여 감히 지경을 넘어
 침범하였는가? 너희들을 모두 포박하여야 하겠다.’하고, 이어서 뱃머리에 나아가 큰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디 송도(松都)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하러 나왔다. 

  이제 되돌아갈 것이다.’하므로, ‘송도는 우산도(于山島)로서, 그것도 우리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하였습니다.  

 

 새벽에 배를 몰아 자산도에 갔는데, 왜인들이 막 가마솥을 벌여 놓고 고기 기름을 다리고 있었습
 
니다.  제가 막대기로 쳐서 깨뜨리고 큰 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들이 거두어 배에  싣고서 돛을
  올리고 돌아가므로, 제가 곧 배를 타고 뒤쫓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광풍을 만나 표류하여 옥기소(玉岐島)에 이르렀는데, 도주(島主)가 들어온 까닭을
물으므로, 제가 말하기를, ‘근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울릉도,우산도 등을 조선의 땅으로 정하고,
 막부의 문서까지 받았는데, 이 나라에서는 제대로 된 법이 없어서 이제 또 우리 땅을 침범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자, 마땅히 백기주(百耆州)에 연락하겠다고 하였으나,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습니다.

 제가 분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여 배를 타고 곧장 백기주로 가서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島監稅官)
 가칭하고 장차 사람을 시켜 본도에 통고하려 하는데, 그 섬에서 사람과 말을 보내어

 맞이하므로, 저는 푸른 비단옷을 입고 검은 갓을 쓰고 가죽신을 신고 교자를 타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말을 타고서
 그 고을로 갔습니다.

저는 도주와 대청 위에 마주앉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 아랫단에 앉았는데, 도주가 묻기를,‘어찌하여  들어왔는가?’하므로, 답하기를‘전일 두 섬의 일로 문서를 받아낸 것이 명백할 뿐만이 아닌데,
대마도주(對馬島主)가 그 문서를 빼앗고는 중간에서 위조하여 두세 번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법을
어겨 함부로 침범하였으니, 내가 장차 관백(關白-옛날 일본의 벼슬이름)에게 상소하여 죄상을 두루
 말하려 한다.’하였더니, 도주가 허락하였습니다. 

드디어 이인성으로 하여금 글을지어 바치게 하자, 도주의 아비가 백기주에 간청하여 오기를,
이 글을 올리면 내 아들이 반드시 중한 죄를 얻어 죽게 될 것이니 바치지 말기 바란다.’하였으므로,
관백에게 바치지는 못하였으나, 얼마 전에 지경을 침범한 왜인 15인을 적발하여 처벌하였습니다. 

 이어서 저에게 말하기를,‘두 섬은 이미 너희 나라에 속하였으니, 뒤에 혹 다시 침범하여 넘어가는
 자가 있거나 도주가 혹 함부로 침범하거든, 모두 국서(國書)를 만들어 역관(譯官)을 정하여 
들여보내면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하고, 이어서 양식을 주고 사신을 정하여 호송하려 하였으나,
 제가 데려가는 것은 폐단이 있다고 사양하였습니다.”

 안용복이 비변사에서 조사를 받을 때 진술한 그의 말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하는것을  국역한
 자료( 출처 :독도본부 소식지 2002년 5월호])  

 

                        

                           

    여행정보 
      1>. 위치 :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 229-1 (수영사적공원)
      2> 문의 : 051-752-2947 . 

 

Posted by 혜 천


금강줄기 !  깨끗한 물이 있는 옥천

강과 산이 만들어 놓은 자연에 사람이 있고

사람들로 인해 더욱 빛나는 여행지.

그 속에 시가 있고  정지용시인이 있다. 

경북고속도로 옥천 IC에서 시내로 진입하여
7번 군도를 타고
 수복리 방향 2km 지점에 생가가 보인다.
옥천읍 하계리에 서정시 <향수>로 잘 알려진
정지용 시인의
 생가와 문학관이 있다.
 
아담한 초가집을 돌담길을 
돌아 시비가 있다.
그리고 사립문을 들어 서면 우물과 장독대가 있으며
 초가집이라 도 정겹다.
내부에 들어가 
벽에 걸린 글을
읽어보고 옆문을 나서니
 실개천위에 청석 돌다리가 보이고
 그 옆에 물레방아가 쉬고 있었다.
 


                                            정지용 -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 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 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그 때 그 우물이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 있습니다.
         시인은 가셔도 그가 먹었던 그 우물은 그대로 있으니.....

                                              실개천과 청석 다리
        
            정지용시인의 생가는 옛 우물이그대로 있고 실개천이라는데 물이 없는 실개천이다.    
            아담한 초갓집한채가 있다. 그러나 예전엔 실개천에 물이 흘르고 지즐대는 소리를 들으며
            작은 사랍문을 밀고 들어가면 어느새 아련한 그리움의 향수로 빠져들것 같은 곳이다.


         생가 뒤쪽에는 정지용문학관이 있다.

       140여편의 시를 남긴 정지용으로서의 삶과 문학정신을 살펴 볼수있다.
문학관은 문학전시실 , 
    문학체험관, 영상실, 문학교실 등으로 되어있고 , 관람객이 직접 체험할수있는 영상시설이
      
잘 갗추어져있다.이곳에서 정지용시인의 삶과 문학정신 ,인간미등을 영상 다큐로 공부할수도 있게 되어있다. 

                                       정지용시인과 바람흔적 인증샷입니다

          정지용 시인은 누구인가?를 알아보자.
       우선 1988년 해금되면서 <향수>가 국어 교과서에 실려 거의 모든이가
정지용을 알고
        있을 것이다.19
02년5월15일 충청북도 옥천에서 출생하여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도시샤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휘문고교에서 교사생활을 했고, 광복후에는 경향신문사 편집국장 과
 이화여전
교수를 지냈다.
       6,25 동란으로 납북되어 사망한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26년 학조 창간호" 커프 프란스"로
       데뷰하고 초기에는 모더니즘과 종교적 경향의 시를 주로 발표했으며 이후 널리
 알려진
        <향수>에서 보듯이 후기에는 서정적이고 한국 토속적인 이미지 시를 발표하였다.

         청록파 3인을 추천하고, 윤동주시인을 한구구시단에 소개하는등  공적이 매우 크다고 한다. 
         대표작으로
<향수> <고향>
<바다> <백록담> <장수산>등 140여편이 있다.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의 노래 『향수』를 들으면
첫 연을 듣고 나면  실개천 주위로 빠져있고  언덕배기엔  황소가 있는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시골에 살았다면 누구나 이런 향수를 갖고 있을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연에서는 졸음에 겨운 늙은 ‘아버지’가 떠오를 것입니다.  도시의 아버지와 시골의 아버지는  완연히 다릅니다. 시골의 아버지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시(詩)가 되고 글이 되는 아버지들입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를 부를 때에는 정말 머릿속에 넓은 들에 흐르는 실개천과 누런 소가 그리운 듯이 떠오르는 느낌 이었습니다.   즐겨듣는 노래 향수의 고장 옥천 정지용생가를 다녀온적이 있었습니다.


여행정보
1>찾아가는길
  * 경부고속도로 옥천 ic  에서  옥천시내로 진입 그리고 7번군도에서 수복리 방향 2km지점에 위치.
2> 숙소    * 옥천광광호텔 ☎ 043-731-2435

3> 주변 볼꺼리 
    * 육영수 여사 생가
    * 장계 관광단지 와 역사관

4> 문의 : 정지용 문학관 : ☎ 043-730-3588   www. jiyong.or.kr
              옥천군 문화관광과 ☎ 043-730-3081
5> 찾아가는길 
 

     

 

Posted by 혜 천

   입구 간판에서부터 전(傳)구형왕릉이라며
   전(傳)자를 붙여 쓰고 있다.
  전(傳)자를
   왜 썼을까 싶다. 우리나라 역사의 많은
   부분이 전(傳)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꼭 아니라고 증명된 것도 아닌데 ....
  하는생각이 들었다.
  차장에서 올려다본 돌탑 무덤이 잘 만들어져
   있고 신비롭기도 하였다.

  지리산 골자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을 건너면
  홍살문이 서있고,
  그 홍살문 우측에는 
  구형왕의 손자 김유신이 화랑들을   이끌고
  지리산 자락을
 돌며 훈련을 했다는 사대비가
  세워져 있으며  좌측엔 비각이 세워져있다

 

                            왕릉을 빙둘러 쌓은 돌이 제주도 돌담을 연상시킨다

 

                        이 돌무덤을 중심으로 같은 잡석으로 높이 1m 내외의 담을                        
   쌓고 전면 중앙에 <가락국호왕릉(駕洛國護王陵)〉이라고 새긴 
      석비가 있고 비석 좌대에는 연꽃.연잎이 새겨져 있고  좌우 양쪽엔 만(卍)자가 새겨져 있다. 

 

     문무인석(文武人石), 돌짐승,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 등도 배치되어 있으나  
                               근래에 만들어진 느낌이다.

 

                   

      층단(層段)을 이루는 방형(方形)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경사면에 축조하였다. 
       전면은 7단을 이루고, 후면으로 갈수록 경사져서 층의 높이에 따라 체감되고 있다.

    꼭대기는 타원형으로 되었고 전면 중앙에서의 전체 높이 7.15m이며, 제4단 동면에
      너비 40cm 내외,  높이 40cm 내외, 깊이 68cm 내외의 감실이 개설되어 있다.

 

                                 

        구형왕릉 ,저 능 위로는 나무잎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새도 능 위에서는 똥을 누지 않는다는  그러고보니  돌무더기위에 나뭇잎이나
        새똥은 보이지 않았다.
       깨끗하게 청소해 놓은것 처럼 신비롭기도 하였다

 

     주차장 맡은 편에는 구형왕의 손자 김유신이 용화향도를 이끌고 지리산 자락을 돌며 훈련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활을 쏘며 연습을 했다는 사대비가 세워져 있다.

 

                    

        산을 다 내려간 입구에는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을 모시는 덕양전(德讓殿)이 있다.
     덕양전 경내에는 홍살문, 영정각, 안향각, 정숙당, 추모재 등의 건축물과 연못이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 16일과 9월 16일에 제향(祭香)이 올려지고 있다.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371에 있는 덕양전은  양왕(仇衡)과 왕비(桂化)양위의 위패를 모시고
   춘추향례와 삭망향화를 드리는 덕양전이다.

 유래는 서기 532년 신라 법흥왕 19년(가락기원 492년)나라를  신라에 선양하고 이곳 왕산(王山)
 수정궁(水晶宮)으로 들어온  5년후 돌아가셨다.

  그후 향화를 계속하다가 전화로 중단되었다가 서기 1798년 심릉후 능하에, 능침을 짓고 
다시 향례를 올렸다. 서기 1898년 숭선전(김해수로왕능침)이 사액됨과 동시에  덕양전으로 개칭하여   서기 1930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어   1991년 문화재 정화사업에 의하여 중건된 곳이다 

 

 구형왕의 릉인지 아니면 그를 기리기 위한 탑인지 아니면 그냥 돌무지인지는 모르지만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구태여 아니라고 할필요는 없을것 같다. 
       둘레길 출발지를 향하여 또 다시 발길을 돌려 지리산속으로 들어갈것이다.                           

                      

     여행정보 
    1. 위치 :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 16번지 
    2.전화번호 : 055-970-6443


Posted by 혜 천


지난 1월1일  해맞이를 한일이 벌써 365일이 지났습니다.
작년에는 노무현대통령과 김대중 두대통령께서 가신
해였다고 올해는 늘 좋은일 만 있기를 기원했었는데 ,
크나큰 사건들이 너무 많았던 한해 같습니다.

지난 365일 동안 우리나라엔 큰일이 아주 많았습니다.
1년내내 이슈가 되었고,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
 4대강사업. 6.2 지방선거에서 야당이 압승한 일도
있었으며, 천안함 침몰사건과 북한의 연평도 포격은
 아마 우리의 안보가 너무 안이한게 아닌가 생각케 한
사건이였습니다.   

그러나 바람흔적은 올해 많은 곳을 여행을 했습니다.
지난해는 자동차를 이용하여 다녔다면
올해는 걷고,버스타고 다니며 전국을 여행했습니다.

4월 옆치기와 15시간동안 완행 열차타고 강원도 정동진까지
다녀왔으며, 충청도여행에서는  익산의세계 대백제전과 대하연의 아름다움에 흠뻑젖었던 일,
그리고 8월 무안 회산백련지 연꽃 축제에서 다성초의선사 생가를 둘러본일,

10월 전주비빔밥축제를 비롯해서, 부안,남원,익산여행 그리고 전남 진도,해남,영암,목포
마지막으로 제주올레길 여행하며 엉또폭포,차귀도에서 해저잠수함여행등
 즐거운 한해가 되었드랬습니다. 











 작년에도 떠 오른 태양이지만  어제의 태양과는 다른 태양입니다.
 어제의 생각과 오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다르기에 계획도 다릅니다.

 계획이 다르면 살아가는 방법도 다르고 결과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2011년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계획으로 작년과 다르게 살아보려고 합니다 .

 그렇다고 확 바꿀수는 없는 것이죠 . 조금만 바꾸어 살아도 많이 바꿔질 것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불빛이 차츰차츰 소망의 빛으로 빛납니다.
         " 2011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

Posted by 혜 천
   
  
김해버스터미널에서 걸어서 5분거리에있는
   가락국 봉황동 유지적지가있다 
    
   김해 가락국 봉황동 유적지 정상에 오르니
   넓다란 공터에 가락국 천제단 (駕洛國 天祭檀) 표석이
   먼저 눈에 들어 온다.

  하늘에 제를 올리는 성스러운 곳이였다. 
  남쪽 중앙에 큰 바위가
우뚝 서있다.

  그 바위가 오늘 주제가 된 황세바위 다.

   
           천제단에서 조금 더 오르니  전설을 간직한 황새바위가 있다.  

         황세는 가락국의 9대 임금 겸지왕(숙왕) 때의 인물로 황정승의 아들이다.

       황정승과 친구 사이인 출정승은 각기 아들을 낳으면 의형제를 , 아들과 딸을  낳으면서로
        결혼 시키기로 약속하였으나, 황정승의 집안이 몰락하자 출정은 딸인 여의를 아들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서로 의형제를 맺은 황세 여의 어릴때부터 같이 자랐는데

         어느날 황세여의에게 오줌멀리누기 시합을 제의하자 여의는 삼대줄기를 사용하여
         위기를 넘겼는데 , 이 시합을 한곳이  바로 황세바위이다.

                  황세장군과 여의낭자가 오줌멀리누기 시합을 해던곳  황세바위

   여의낭자가 책을 읽었다는 독서대   

         여의가 자라면서 점점 여인의 모습을 띠게 되자 이르 수상히 여긴 황세가 거북내
          (지금의 해반천)에서 멱을 감자고 하였는데 여의는 할수없이 자기가 여자임을 밝히고
         둘은 결혼 약속을 하였다.

 
             그후 신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황세가 왕의 명을 받아 유민공주와 결혼하게되자

              여의낭자는 황세장군을 그리워하다가 죽었다. 황세 또한 여의낭자를 따라 죽었으며

              ,유민공주는 유민산(지금의 임호산)으로 출가하여(지금의 흥부암) 여승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이다.

            출정승의 딸 여의낭자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 < 여의각>
            

                             출정승의 딸 여의낭자를 추모하는 사당 내에있는 여의낭자 영정
                                                                                         

          출여의 낭자(여의낭자) 정절을 추모하는사당이다.  황세바위 전설에 나오는
          황세장군과 꽃다운 24세의 아릿다운 여의낭자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들은  후세
         사람들인 김해
 회현동 주민들이 1973년 이 여의각을 세워 매년 단오날 추모제를
         올리고 있는 곳이다.

 
                                          정절 출여의 낭자 의령단
 

      

                                        봉황산 정상에있는 봉황대 글씨

          봉황대 정상에는 봉황동 유적이 산재해 있는곳이다. 가락국의 마지막왕 구형왕과 형제인
       유민공주가 황세장군과 여의낭자의 죽음으로 이룬 사랑을 빌어주기 위해 임호산
으로
         출가하는 모습에서 신라에 넘어가는 가락국의 망국을 보는  슬픈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여행정보

1, 위치 :  경남 김해시 봉황동 253
2. 전화:  김해시 관광과  ☎ 055-330-3254
            사적지관리소 ☎ 055-330-3589
3. 찾아가는길 :  김해 버스터미널에서 걸어서 5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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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혜 천
동쪽 바다끝에 있는 한폭의 풍경화를 찾았다.
포항에서 갈수도 있고, 묵호에서 갈수도 있는곳이
울릉도  섬이다.

동해의 거센파도 때문에  많은 여행객이 나서기를
꺼려하는곳 이라고 들었다. 배멀미 때문에 쉽게
 나서지 못하는사람이 있지만 , 거센파도가 삶을 골라서
울릉도를 받아 들이는 꼴이다.

날씨가 좋아 쉽게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울끈불끈 치솟은 암벽이
눈앞을 가로 막는곳이 망향봉이 아니겠는가.

망향봉과 향남마을 사이에 선박의 접안시설을  갖추어
항구자체가 커보이지 않지만 아늑한 느낌을 주는 항구였다. 


 
  다른 곳을 둘러보고 케이블카를 타고 망향봉에 올랐다.

  도동약수공원에서 케이블카를 타면 망향봉정상의 독도전망대에 올게 됩니다.  도동항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날씨가 아주 맑은날에는 독도를 볼수있다 합니다.
   그래서 독도전망대라고도 합니다.   

   망향봉에 올라야 울릉도를 한눈에 내려다볼수있고 그래야 울릉도를 전부 봤다고 할수 있다기에
   아니 볼수야 없었지요. 내려다보며 사진으로 담아온것을 보고 설명을 하겠습니다. 



도동약수공원내에 있는 천태종해도사입니다. 절보다는 공원내 약수터까지 올라가서 철분이 많이
 섞인 약수 한사발 하면 흘린땀이 금방 싹 식고 맙니다. 그리고 안용복장군 동상과 비석이 있습니다.




                                                   울릉도 도동항 전경



아래 사진과 위 사진 모두 도동항 좌우 산책로 입니다. 도동항에서 행남등대로 가는 왼쪽 절벽으로
 난 산책로가 왕복 1시간정도 걸리니 걷기 좋은 코스였습니다.  암벽으로 난 산책로엔 기묘한 암벼과 동굴을 지나면 용궁횟집도 있고 행남읃등까지  재미있는 산책로입니다.  

도동항에서 왼쪽 산책로를 따라가면 울릉도 흑비둘기( 천연기념물 237호)서식지 후박나무 숲이 있습니다. 그리고 울릉도의 새로운 미래항구를 만들고 있는 사동까지 갈수있습니다.





  망향봉 독도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울릉도의 중심입니다.
 군청,경찰서, 교육청등 모든 기관이 있으니 울릉도의 중심지 라고 봐야죠. 이곳 중심지에는
 신호등도 없고, 주유소도 없고, 교통순경도 없답니다.

 울릉도엔 3무5다(3無5多)가 있다는데 무엇인고 하니 3무는 도둑,공해,뱀이 없답니다
 도둑은 섬이니 도동항만 지키면 나갈수 없으니 아예도둑이 안 생긴답니다. 공해없느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고, 뱀도 없답니다. 엤날어느날 육지에서 뱀 한자루를 몰래가져와서 울릉도에 풀어 \
 놓았는데 그 뱀들이 살지 못하고 자연사 했답니다. 아마 많은 행나무 때문에 향나무 향때문에
 못산다고 합니다.

그럼 5무는 무엇일까요?
향나무, 바람,미인,물,돌 이라고 합니다. 설명은 필요 없겠네요.
     



 독도박물관이 왜 울릉도에 있을가?
 독도에는 사람이 없기때문에 울릉도에 있지요.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을 한눈에 볼수있게
 각종자료를 전시해두고 많은 사람이 보고 공부하도록 해둔곳이다.

1995년 울릉군이 부지를 제공하고 건물은 삼성문화재단이 1997년 건립하여 서지학자 이종학 선생께서 소장자료를 울릉군에 귀증하여 독도수호 전진기지로 활용하고 있는 영토박물괸이다.


 
  독도 박물관에는 정기적으로 독도관련 전시를 하고 있다.
 독도여 우리들의 혼이여 ! 가 말하듯이 독도는 우리모두가 눈여겨 보고 지켜야 할땅이다.
  지키기 위해서는 공자가 말했듯이 < 남을알고 나를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지 않았나.
 독도에 대해 많이 알기위해 독도 여행객들은 반드시 들려본다고 합니다.


독도박물관 바로 아래 향토사료관이 있다 독도박물관을 들리면 반드시 향토사료관에도 자연
들러보게 되는곳이다.  울릉도 역사를 보여주는 270여점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이왕 울릉도 여행을 왔으면 울릉도 개척당시부터 이 섬에서 무슨일이 있었는지 한번 둘러 봄이 좋다. 편의도구, 가옥구조,및 유적,유물등이 전시되어 있다. 울릉도 도동리 신묘명 각석문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이 각석문은 1711년5월 삼척영장 박석창일행이 울릉도 수토의 행적을 남기기 
 위해 새긴 것이라고 한다. 



 전망대에서 뒷쪽으로 올려다보면 저 멀리 울릉도 성인봉이 보입니다.  성인봉까지 등산을 한다면
 이곳으로 내려 오가나 올라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Posted by 혜 천
일년에도 몇번씩 일본이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우리나라의 동쪽 독도를 운좋게 발을 딛디도 왔습니다.

두번째 독도방으로 운좋게 상육할수있었 다행이였습니다.
날씨가 수시로 변화하여 독도 앞까지 가서도 발을 목 딛고
돌아 오는 사람이 많은 섬입니다.

1696년 안용복장군이 해산물 채취를 나갔다가 일본어부들과
 충돌이 있어 일본으로 잡혀 가기 이전  신라시대부터
우리나라 땅이 일본으로부터 수난을 당한곳이 독도라니.... 

독도에 발을 딛고 보니 과연 일본이 탐낼 정도롤 아름다운 섬이였습니다.
  


동도 선착장에 발을 딛인곳이다. 동도에 있는 경비대,와 등대 오르는 계단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통제되었다. 멀리서 바라만 보고 올수 밖에 없없다. 위쪽에 올라야 볼만할것인데.....  



동해의 푸른바다와 하얀파도에 씻겨 만들어진 동도는 서도와 151m 정도의 간격을 두고 있으며
수심도 10m 이상 깊다고 한다.  동도의 높이는 해발 98.6m이며 정상이 비교적 평탄한 편이라 독도 경비초소와 헬기장,등대가 세워져있다.

면적은73.29m2,둘레2.8km정도로 중앙부는 원형상태로 해수면까지 꺼진 천정굴이 있다고 한다.


 

동도 정상으로 올라기전  대한민국 동쪽 땅끝이라는 표석이 있다. 글자 아래에는 동서남북 방위를
 표시하여 방향을 가늠할수있게 해놓았다.

 

서도는 동도 선착장에서 내려 바라만 봐야 되었다.
서도는 해발 168.5m로 뾰족한 원뿔 모양을 하고있으며 동도보다 큰섬으로이루어져 있다.

동도보다 조금 크지만 경사가 가파른 하나의 봉우리로 형성되어 있어 정상으로의 접근이 어렵다
고 한다. 괭이갈매기 서식지로  사람의 접근이 되지 않아 아직 태고적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  인근에서 봐도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서도의 북쪽 해안의 물골바위틈에서 조금씩 떨어지는 지표수는 하루 1,000리터 정도로 이곳의
귀중한 식수라고 한다.


 서도에 있는 주민숙소는 보수공사중이였다.
 최초의 독도주민 (최종덕)이 살던 곳으로 지난 97년 새로 건립하였으며, 2006년 2월19일부터
 독도 주민 김성도씨가 현재 이곳에 살고 있다. 주변 조업 어민들의 예기치 못한 풍랑이나  태풍이 발생할때 대피소롤 이용되고 있는 유용한곳이기도 한곳이다
 

삼형제굴바위는 서도 북동쪽 탕건봉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침식작용에 위해서 만들어진 세개의 굴은  머리를 맞댄세명의 의좋은 형제 같은 모습이라고 이름붙여졌다고 한다.




동도와 서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모습으로 보여 두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다한다.  동도에서 보면 촛대바위, 서도에서 보면 전장에출전하는 장군의 긴장된 얼굴모습을 보여 장군바위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숫돌바위는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이 생활할당시 바위에 갈을 갈았다고하는 전설이 있으며, 바위의 암질이 숫돌만드는 돌과 비슷하여 숫돌바위라고 한단다.

독도에 발을 딛고 부터 많은곳을 봤지만그래도  시간은 한정되어 있어 못보고 온것도 많았다.
동도의 악어모양의 악어바위,얼굴바위,부채바위,천장굴,독립문바위,한반도바위
그리고 서도의 탕건봉,코끼리바위,들에 대해서는 멀리서 바라볼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89개위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은 배를 타고 한바퀴 돌아야 볼수있을것 같다.

독도는 어부들의 대피소가 아니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 다니는 많은새들의 쉼터이자 안식처라고 
하는데 이날은 새한마리 못보고 왔다. 아마 다시 독도에 한번더 오리고 그러는 모양이라 생각을
가져 본다.


Posted by 혜 천


11월 날씨가 춥지 않을때 다녀온 울릉도 ,
그때 울릉도 오징어 잡이 선박과 야간에 바다에서
오징어잡이 어화를 보고 즐거워 한일도 있었습니다.

울릉갔다 올때 마른오징어 한축 사가지고 오세요 하는
애들의 부탁도 있고 해서 오징어에 관심을 가졌답니다.

울릉도 五味중의 한가지에 오징어도 속하니 울릉도
어민들이 신경을 쓰고 잡는데서부터 건조 출하까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내는 것이 오징어이기도 합니다.
  

울릉 오징어의 대부분은 저동항에서 출어하고 만선으로
들어오는 곳이기에 아침일찍 이곳에 나가면 들어오는
배들을 볼수도 있고, 배에서 내리는 장면부터 경매하는 모습
 손질하는모습등 다양한 장면http://valley.egloos.com/tb/travel들을 볼수 있습니다.

특히 울릉저동항은 어업전진기지로 한때 불야성을 이룰 정도로 황금기도 있어는데.
오징어도 수온에 따라 움직이는 생물이니 지금은 그때의 반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오징어는 9월에서11월이 성어기라, 이때 잡은 오징어가 제일 맛있는 오징어 라며
 제일 바쁘기도 한철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여행한 때가 11월이라 제철에  보게된것 입니다. 

 
  오징어를 잡을 땐 특별한 미끼를 쓰는 건 아니고,
  불을 밝혀 놓으면 불빛을 따라 오징어들이
   몰려 들기 때문에 오징어배는 많은 불을 밝히고 조업을 한답니다. 

 
이때 오징어잡는 기계 조상기는 움직이기 시작하고,  예전에는 일일이 손으로 로라를 돌려서
 오징어를
잡았다는데 세상이 좋아지다 보니 자동으로 만들어진 기계로 조업을 한답니다. 

로라낚시 조상기  한 대당 600만 원 정도 하니 그리 쉽게 다룰 기계도 아니란다. 조상기가 도입되기 전만 해도 어부들이 직접 손으로  돌려야 했기 때문에 20톤 가량 되는 어선의 경우 20명 정도의
 어부들이 배를 타고 작업을 했는데,
지금은 어선 한 대에 기껏해야 선장, 기관장, 어부 3명- 4명이 전부라고 합니다.


        출어준비를 마치고 어둠이 깔리면 저 많은 등에서 불빛을 밝히고 조업을 할 선박입니다.




  울릉도 내수전 전망대에 올라 울릉도 앞바다에서 조업하는 오징어배의 불빛을 보면 또 하나의
 구경꺼리였습니다. 그래서 울릉군에서 이 불빛을 관광상품화하여 저동어화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익일 새벽 야간조업으로 만선을 한 오징어 배들이 저동항과 도동항으로 들어 오면 그때부터 
  항구는 시끌벅쩍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경매꾼들, 선주, 경매받기위해 몰려든 상인들, 그리고
  우리와 같이 육지에서 관광 온 사람들로 북쩍이는 항구가 됩니다.

  그래서 어시장엘 가면 사람사는 냄새가 난다는 말이 이런 광경을 보고 한 말이 아닐까 생각
   되기도 했답니다.    
 

               경매받은 오징어들을 손질하기 위하여 각자 구역에 모아둔 오징어들입니다. 

     
     
    한마리 한마리 오징어 배를 가르고 오징어 내장을 불리하는 작업을 합니다.
    오징어는 눈 말고는 버릴것이 없답니다. 내장은 오징어 내장탕 재료로 쓰기 때문에 별도로 모아
     식당에서 사가지고 간답니다.     


    내장을 제거한 오징어 입니다.  바닷물로 깨끗하게 씻고 순을대에 끼워 말기를 빼고 건조장으로 
     옮겨 갈것 입니다.

                                  순을대에 끼워진 오징어 모습입니다.



     청정지역에서 당일 잡은 오징어를  당일 손질하여 , 청정지역에서 말리니 , 그래서 울릉도
     오징어가
   맛있다고 합니다.  

        이곳 도동항 오징어 건조 덕장은 한폭의 그림같이 아름답습니다. 수천마리의 오징어들이
      햇볕을 쬐고 있습니다. 반건조 오징어도 되고, 완전 마른오징어로 오징어맛객들에게 팔려
      갈것 입니다.



울릉도에서 맛본 오징어들입니다. 도동항 해안도로 바닷가의 용궁이란 횟집에서 살아있는 오징어
 회 한접시 하고, 그리고 마른오징어 한축입니다. 오른쪽은 저동항에서 오징어 손질할때 부산물로 나오는 오징어 내장으로 끓인 오징어 내장탕입니다. 부드러워 술국으로 안성맞춥이였습니다.



 마른오징어를 시실때 울릉도 오징어 구별은 오징어에 붙어 있는 땡기대에 <울릉도산 >라는
 푸른글씨가 있습니다. 이걸 확인하면 다른곳 오징어와 구별할수 있답니다.


Posted by 혜 천

  비오는날 아침 버스가 미륵사지에 도착했다.
 버스 주차장에서 우의를 챙겨 입고 카메라를 들고
 내렸지만 행동하기가 참으로 불편한 구경이었다.

  비는 주럭주럭 내리고 있었으나 첫눈에 바라본
 미륵사지는 와  ∼ 넓고 크다는 느낌이 확 밀려들어 왔다.

 멀리 보이는 미륵사지 동탑과 보수해체중인 서탑의 높다란
 건물이 잔디밭과 잘 어울리는 벌판에 위치해 있었다.

 

  문을 지나 들어온 우리들 앞에 나타난 2개의 연못에 이르렀다. 이 연못은 서동이 백제의 무왕이
 되어 왕비와 함께 사자사에 가던중  지금의 미륵산인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

 그 때 못가운데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나자 경배한 후 왕비가  이곳에 절을  짖기를 청하자
 산을 헐고 못을 메워 미륵사를 세웠다.  

 

       연못을 지나 미륵사를 상징하던 2기의 당간지주가 서로 바라보며 우뚝 서있었다.
       당간은 온데 간데 없고 당간지주 만 서있고 박물관에서 본 당간지주 깃발이 생각났다.

       깃발을 바라보며 나라의 흥망성쇠를 생각했던 백성
들의 마음은 어떻했을까 생각되어진다..
       당간지주 주위에는 미륵사지 석탑의 부재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고  하나하나에
       꼬리표가 붙어 복원하기 위하여 해체되어 있다.

 

        건물 내부에는 미륵사지 삭탑 을 복원하기 위하여 해체작업을 하고 있었다. 
      해체작업의 마무리공정 인듯하였다. 백제문화의 진수인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 최초,
       최대의 석탑이라는 미륵사지 서탑이 전설처름 서 있었던 곳이다.
 
      한쪽에 시멘트 덩어리를 얹은채 견디어 오다 이제 1400년의 베일을 하나 하나하나 벗고
      재 탄생을 하기위하여 휴식하고있다.

     지금 해체하는것은 옛날 백제 석공이 만들었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해체복원
     중이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바뀌는 시기에 세워진 최고의 석탑인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이다.  
   백제 기술이 총동원된 석탑은 돌로 만들어 졌지만 목조로 만든 것보다 더 정교하게 만들어
    그  아름다움이 현세까지 전해져지고 있다.

 석탑해체 과정에서 출토된 금제사리호는 639년 백제 무왕왕후의 발원으로 미륵사 석탑이
 세워졌음을 알리는 귀중한 유물이었다. 높이 13cm의 금제사리호함의 둥근몸체를 감싸고있는
  연화문양에 인동당초무늬,물고기 알 모양인 어자문이 틈새를 채워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구슬은 모두 637점이며 녹색계통이 587저으로 가장 많고 구슬중앙에 실을 꿰멜수있는 구멍이 뚫려 있으며 다양한 크기로 확인되었다.

 

  
미륵사지 동쪽에 있는 탑의 정식 명칭은 동원 9층 석탑, 새것의 느낌이 많이 나는 탑에서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색이 다른 돌을 찾아보며 세월의 흔적을 발견한다.
 
1992년 복원하며 석탑기단석과 탑신석등 남아 있던 부재를 사용하고 소실된 대부분을 제작하여 복원된 탑이다. 탑 1층 내부로 들어가보니 동서남북으로 트여있었다
.

  미륵사석탑 뒷쪽 금당지 , 대웅전을 받히고 있던 돌기둥들이 남아있는 동금당터가 있었다. 


금당지터

                              


    동원9층탑에서 제일 윗부분 에 놓여지는 옥개석

   석등하대석은 연호문 수막새 모양으로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석등중 가장 오래된
백제시대의 석등이다.

  미륵사지 박물관으로 출토된 유물19,000여점 을 보관 전시    

  백제의 혼이 깃든 미륵사지와 선화공주에대해 더 자세히 알게된 계기가 되었으며 지금껏 많이
  남아 있는 신라 사찰만 봐 오다가  백제 사찰의 정교하고 스케일큰 미륵사지를 볼수있어 행복한 여정이 되었다. 
       



Posted by 혜 천


            누군가 가  산은 절이 있어 온전한 산이되고  ,
            절은 산이 있어 온전한 절이된다고 했다. 

           가야산에는 예전엔 사찰이 많았다고 한다.

           그 흔적이 100 여곳이 넘는다고 하니 가야산이
           명산인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명산 엔 명당자리가
          있는모양,

         그래서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도
         이곳으로 이사온 모양이다.

   
          남연군은 전주이씨요,이름은 구 (球)이며 인평대군 7대손이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이기도 하다.

         인평대군 이후 왕권을 잡은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으니 불안한 왕족 이었다.

          남연군의 묘는 처음 경기도 연천에 있던것을 흥선대원군이 왕권회복을 위한
          풍수지리설을 믿고  명당자리에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기로 마음 먹는다.

          예산군 덕산 가야산 밑 명당자리에 이장하면 2대에 걸쳐 왕이 배출된다는
          지관(정만인)의 말을 듣고 가야산 명당자리에 사전 답사를  왔으나 ,
          이미 그곳엔 가야사 라는 사찰이 들어서 있다.

          암암리에 가야사를 불태워 폐사 시키고 남연군의 묘를 이장 시키니
         
현위치 예산군 덕산 이다.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고 18년후 대원군으로 정권을 잡고, 그후 고종황제 와 순종이 
        
등극하니 명당설이 맞아 들어간 셈이다. 

         이 때는 외국 열강들이 통상 개방을 요구하던 시절. 조선은 서양 오랑캐와는 통상할수
         없다는 쇄국정책을 밀고 나가든시절.
이 명당설 때문에 " 남연군의 묘 도굴사건"이
         일어나는 단초가 되기도 하며, 우리나라 근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기도 하다.
 
        이 도굴사건은 1868년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프랑스 선교사와 조선인 천주교도들과
        함께 남연군의 유골을 확보하여 통상개방 협상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도굴하다 실패한
        사건이였다.

        이사건으로 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우며 쇄국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 박해를 강화하고

         천주교 신자를 학살한 계기가 되었다.,이렇게 남연군의 묘 이장으로 정국이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서양 열강들이 너도 나도 밀려 들어와 나라의 장래가 어둡게 된다.
 

 

         요즈음도 명당설이 잠재해 있으니 대원군같은  조상들의 피를 물려 받아서일까? 
        얼마전에도 대통령이 되기위해 조상의 묘를 이장하고 그래서 대톨영이 되기도 하고 

        또 대통령이 되기위해 이장을  해놓은 사람도 있고
선거철만 되면 명당자리 풍수설이
        기세를 떨치는 것이 달나라에 가는 요즘 시대도 옛날과 다를 것이 없는것 같다

        명당자리 풍수설이 맞는 것일까?  말그대로 風수설 일까?

Posted by 혜 천

 

   차를 즐겨마시고 차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분들은 
   아마 초의선사를 모르는 분들은
   없을것이다.

  전남 강진 다산초당을 들러보면 백련사 초의선사를
 떼어놓고
  이야기할수 없을 것이다.

  도시의 가정집에서나 , 도심 한복판에서 커피보다
  차를 즐겨마시는 사람이
  많아지고있다. 다성이라
  불리우는 초의선사의 탄생지 전남 무안 삼향면
 왕산리를
  찾아갔다.

  여름이면  백련향기가 가득할 무안에서 회산백련지를
 스쳐  다성(茶聖)의 탄생지를 둘러보면서
 스님과 차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고 그 역사를 더듬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초의선사 탄생지를 둘러보기 위해  건물 배치도를 읽어 보고 들어가면 이해하는데
  한결 수월해진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내리니 초의선사 탄생지 입구 대각문이다.
 

  초의선사는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출생, 열다섯에 나주 운흥사로 출가하고 열아홉에
 영암
월출산에 올랐다가 해남 대흥사에서 완호 스님을 만나 구조계를 받고 정진한다.

 39세에 일지암을 중건하고 수행처로 삼게된다.
 이곳에서 차문화 부흥을 위하여 동다송과 다신전
 시서와 문집을 펴낸다. 
  81세 입적하기전 다산 정약용,추사김정희,해거홍현주 등 사대부들과
  교분을 나누며 조선후기
 한국 문화사에 큰 족적을 남기신 다승이셨다.  

   이곳은 한국의 다성 초의선사 탄생지이다. 조선 정조15년에 태어나 이곳에서 나주 운흥사로
   출가하시기전에 15년간 살았던 생가터이다. 

 

                                                            용호 백로정

 

                                                    초의 선사 생가 
 

    다 성 사  ( 茶聖 祠 )

 
                                              초의 선원

 

                           그 유명한 동다송 (東茶頌)을 새겨 놓은 표석

 

      초의선사는 시와 그림그리고 학문에도 이름있는 분이셨다. 시풍은 맑고 단아하며 간결 명료
     하여 당시 사대부들은 시승으로서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림과 시는 떨어질수없는것 
     이그림은 초의선생의 유명한 그림이기도 하다.  

 

                               조선 차역사 박물관  

  조선 후기 시, 그림,학문에 는통하고 뛰어난 선승으로 이시대 유명인들 , 다산 정약용, 추사김정희
  등과 교류를 하며 차문화를 발전시킨 초의선생이 태어난곳을 둘러볼수있었다. 

 생가 복원을 한지는 얼마되지 않으나 생가초당, 기념관,차문화관,차역사관,등을 건립하여 차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둘러볼수있는 차 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것 같다.   

 

              여행정보 
             1.위치 :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 943
             2. 전화 : 061-285-0300.  061- 285-0302                                           

Posted by 혜 천

 앞에 금오산이 보이고 정상부터 쭉 훌터 내려 다보니
한마리의 거북이 바다로 들어가는 형상이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 거북이 천지다.
그리고 원통보전도 금색였었다.


이 곳을 마지막으로 여행하고 온 것은 항일암이 화재로
소실되기전이였다.

2009년 12월20일  새벽  대웅전,종무실,종각등 사찰 건물
8동 가운데 3동을 전소한 연말 항일암 화재 사건이 있었다.


그후 1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지금쯤 어떻게 되어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년말 해돋이를 항일암에서 하고 싶은데 도무지 상황을 알수없다.

그때의 추억으로 항일암을 그려보며
행여 연말에 또 갈수있기를 바라며, 이글을 적어 봅니다. 


 
 
해를 향한 암자 항일암 (向日庵)

항일암은 백제 의자왕때 백제땅 여수에 신라 고승 원효대사가 원통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으며 고려 광종9년 에 윤필대사가 금오암으로 , 조선 숙종41년에 인묵대사가 항일암으로 개칭하였으니 ,조선시대부터 불러져 온 이름이 항일암이다.
 
항일암 외에 또 다른 이름이 있으니 사찰편액에 쓰인것을 보니 영구암으로 되어있다.
해를 향한 암자가 항일암向日庵 이다.
 
이런 이름을 왜정시대에는 일본사람들이 일본을 바라보는암자로 해석한 일본인들이니 조그마한
 암자 하나에도 왜색을 불어 넣었으니 왜정시대의 문화 말살정책을 알수 있을것 같다.

 한편으로 임진왜란당시 에는 항일암 슬려들이 호국불교 이념으로 이순신 장군을 도와 승려군으로 참가 호국불교의 요람 으로서의 근거지 역활을 한곳이기도 하다.


 
                                                                                  

 대웅전은 2007년 12월 새로 지어진 뒤
 다음해 상반기 내·외부를 황금으로 단청한
 바 있다.

화재로 대웅전 안에 있던 청동불상과 탱화 등도 함께 소실돼 다시 못볼 문화재가 되고 말았다.

연말도 다가오고, 언젠가 항일암에서 해맞이를 해보고 싶었던 사람으로서 아쉬운 마음이 가득하다.






국내 4대 관음기도 도량

항일암 중생이 고통과 액운이 있을때 일심으로 기도를 하면 모든 액운을 없애주고 소원을 들어주시는 보살이 관세음보살 이다.

이 관세음보살을 모시는곳이 관음전이다.
강원도 낙산사 홍련암, 남해 금산의 보리암 , 강화도 보문암
그리고 여수 금오산 항일암이 국내 4대 관음 기도 도량이다.

그리고 이곳 항일암엔 항일암 관음전과 원효대사 관음전 2개가 있고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는 해수관음보살 상이 있다.




 7곳의 바위 틈새 지나면 소원성취

   항일암에는 일주문을 지나 원통보전으로 이르는 길부터 바위 틈새를 지나야 통과할수 있다.
    이곳에 7곳이나 되는 바위 틈새가 있으며 이 7곳을 순차적으로 통과하면
     한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설이 있다.


 기도빨 잘받는다고 소문난 항일암
기도빨 잘 받고 한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소문으로 인해 전국각지에서 참배객과 순례객이 많은
 곳이다. 특히 연말년시 해맞이 철에는 움직일수 없을 정도로 인파가 붐빈다고 한다.
 이곳 에선 돌거북 한마리를 시주하고 열심히 기도하면 한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으로 
보살님들이 많이 온것을 볼수있다. 
   

일출로 유명한 여수 향일암은 연말과 새해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하루 평균 120여명의 신도와 관광객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 있는 우리나라의 명소였는데,빨리 원상복귀되어 올연말 년시 해맞이 보살님들 많이 많은참배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귀의삼보하옵고 작년 12월 말, 원인 불명의 화재로 대웅전과 종각 등 3채를 소실한 이후, 복원불사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만, 화재 사건 이후 여러 상황이 겹치며 기도객과 관람객이 1/3 이하로 감소하여 복원불사 진행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시는 스님들과 신심견고한 불자님들께서 저희 향일암을 참배하여 주신다면 복원불사와 관음성지로 거듭나는 발아의 계기가 되리라 믿습니다. 현재 목조로 임시 대웅전과 종무소를 건립하여 기도와 참배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향일암 주지 원문 합장



여행정보
1 위치 : 전남 여수시 돌산읍 율림리 7번지
2.전화 : 항일암 :061-644-4742
        여수시 문화관광과 061-690-2222     

3) 찾아오는길 * 항공 : 여수 ↔ 서울 (대한항공 061-683-7502 , 아시아나 061-682-2626 )
                    * 기차 : 여수 ↔ 서울 ( 1544-7788 )
                    *고속버스 : 여수 ↔ 서울,부산,광주 ( 061-652-6877)
                    *노선버스: 여수 ↔임포(항일암) ( 노선버스 101,111,111-1, 113번 소요시간 50분)
                    * 여객선 : 여수 ↔ 항일암 (061-644-6255)

4) 숙    박      * 관광호텔 4곳 * 민박및모텔: 해돋이산장 (061-644-6331)
                    거북횟집민박 (061-644-9081) 
일출횟집민박 ( 061- 644-4729 ) 등
                    많은 숙박장소가있음
Posted by 혜 천

 

점심먹으러 도착한곳에 유명한 나무나리가 있다.
주변의 풍경이어우려져 누구나 한번씩 고개를
돌려보게 된다.
이 다리가 월영교이다.

옆에있는  안동 간고등어 집에서 먼저 점심식사를
하고 구경을 하게 되었다. 안동이라는 전통사회에서의
다리는 강과 강으로 갈라져 있는 지역과 지역을
이어주고 그 다리를 통해 사람의 인정을 나누고 정보를
얻는 정보의 공유공간으로 이용되었다.
 
원래 이곳과 저곳의 수많은  사연이 오가던 훈훈한
나무다리를 만날수 있는곳이 바로 안동의 월영교 이다.
 
요즈음은 대개 콘큰리트 다리지만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섶다리 ,농다리,징금다리,돌다리등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다리들이 많다.

그중 안동의 나무다리도 콘크리트다리에서 오는거부감을
싹 가시게하는 정겨운 다리이다.
 
월영교 (月映橋) 말그대로 은은한 달빛이 비치는 아름다운 월영교의 모습과
딱 맞아 떨어지는 이름으로 이곳 시민들의 의견을 모아 댐 건설로 수몰된
월영대가  이곳으로 온 인연과 월곡면 음담골이라는 지명을 상기하여 지었다고 한다.
 
낙동강을 감싸는듯한 산세와 댐으로 이루어진 울타리 같은 지형은 밤하늘에
뜬 달을 마음속에 파고들게 하는곳이라고 하는데 낮이어서 안타갑게 느끼지를 못하게 되었다
.

 

  월영는 이런 자연풍광을 드러내는 조형물이지만 그 보다 이지역에 살았던
 
이응택부부의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을 오래도록 기념하고자 한 사연있는 곳이다. 

 450년전 고성이씨 이응택의 무덤에서 발견된 편지한장은 현대판 사랑과 영혼 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당신을 여의고 아무리 해도 나는 살수 없어요, 빨리 당신곁에 가고 싶어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라며
요절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구구절절이 써내려가고 있는 편지와 함께 발견된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미투리 한 켤레는 450년전의 사랑과 아름다운 부부의 애틋함을
 전하고 있다.

 

  1998년 5월 이용태의 무덤을 이장하다가 나온 58cm * 33cm크기의 한지에 적힌 편지 ,
 한글 고어체
로 적어놓은 이 편지는 사랑하는 한여인의 애타는그리움과 생전에 각별했던
  애절한 사연이 담겨있어 번역본을 적어 봅니다.
 

 원이 아버지에게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은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로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십니까?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해도 나는 살 수없어요. 빨리 당신께 달려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어떻게 살수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당신께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것 있다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거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꿈에 와서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 주세요.
몰래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이 끝이 없어 이만 적습니다.
 

마음이 찡한 남편에 대한 사랑과 슬픔이 느껴지는 편지입니다.

 

 
월영교는 이 미투리 모양으로 제작되어 다리를 건너는 많은 연인들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염원하는 다리이기도 하다. 젊은이들은 은은한 달빛 비치는 날 이 다리를 밟으며 소원을 빌어보자 .  많은 사람들의 소원이 이루어 질것이다.   

월영교에는 점핑날개 고사분수대가 설치되어 있다고 하는데 시간이 맞지않아 보지를 못했다.
다리 양옆으로 시원한 물줄기를 내 뿜으며 월영교 위에 위치한 팔각정에 올라있으면 안동댐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 들온다.
       

Posted by 혜 천

천등산 봉정사 입구에 도착 하기전까지 설악산 봉정암과
헷깔리고 있었다.
안동 봉정사를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시인해야 맞는 것이다.

천등산 봉정사 입구에 도착하고 부터 안동에도 이렇게
큰 천년고찰이 있구나하며
 그동안 사찰을 많이 다녀 봤다고
자부하고 있던 생각이 싹 가셔버렸다.


그래서 더이상 설악산 봉정암을 입밖으로 거론한다면 무식이
탈로 날까봐 입을
다물고 일행의 뒤를 졸졸 따라가기만 했다.

버스주차장 앞에는 천년고찰 천등산 봉정사  국보 제311호
대웅전,
국보15호 극락전 그리고 보물 제449호 고금당,제448호
화엄강당 제1620호 목조관세음 보살상  제1614호 후불벽화 라는
플랭카드가 붙어 있고 
그옆에 :달마가 동쪽으로간 까닭은? "
영화 촬영지라는 조형물이 서있었다.

 

 

         천등사 봉정사 - 이름에 얽힌 창건 전설

* 봉정사가 자리 잡은 산은 대망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산 중턱의 동굴에서
 능인 스님이 득도하기 위해 수행을 하고 있던중 어여쁜 여인이 수행을 방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능인스님은 그 유혹을 물리 치쳤다.이에 그 여인은 선녀로 변하여 수행을 시험 하고자
했노라며 동굴안을 불로 밝혀 주었다. 그래서 그 굴은 " 하늘에서 내린 등불" 이라는 의미로
천등굴이 되었으며 봉정사가 있는 산은 천등산이 되었다고 한다.

* 스님께서 수도를 한후 도력으로 종이 봉을 접어서 날렸는데 이 종이 봉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했다고 한다.    

 

      

 사찰 올라가는 길이 포장된 도로가 아니고 낙엽쌓인 흙길이었으면 얼마나 좋겠나 쉽은 생각을 가지며 걸어  올라가니 왼쪽 편 나무 숲사이로 작은 정자가 하나보인다. 이것이 명옥대(문화재 174호)이며 원래는 낙수대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퇴계 이황선생이 휴가차 들렀다가 물 떨어지는 소리가 옥 굴러가는 소리 같다고 명옥대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해주신다. 조금더 올라가니 천등산 봉정사(天燈山 鳳停寺 )라고쓴 현판이 붙은 일주문이 보인다.
 

  

 *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번째관문 곧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며 한마음 한뜻으로 기도하여   성불하겠다는 뜻을 가져라 하는 의미 아닐까요? 

 

  일주문을 지나 참나무숲을 따라 들어가니 높다란 곳에 만세루가 올려져있다.
봉정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속세의 온갖 걱정과 고민을 잠시 이곳에 버리고 
 들어가거라 하는
이 아닐까요? 

   
 극락전은 국보 제15호로 대웅전보다 먼저 국보로 지정되었다. 1972년 극락전을 해체 보수 공사를 할때 "신라 문무왕때 능인대덕에 의하여 창건되고 이후 여러차례 보수되었으며 고려 공민왕12년(1363년) 다시 수리하였다고 적힌 기록이 나와 지금까지 최고의 목조 건물로 알려져 있던 영주부석사 무량수전보다 더 오래된 목조건물로 확인됨 으로 우리나라 최고 목조건물은 안동 천등산 봉정사의 극락전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알찬 여행인것같다.  


 

 중앙에 있는 대웅전은 이로써 국보 제55호로 등록되었다. 이곳에 있는 후불탱화도 강진 무위사의 후불벽화보다  40-50년 정도 앞선 보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왼쪽의 화엄강당도 보물제 448호이다. 

  

 

 

 영화 " 달마가 동쪽으로 간까닭은?"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영산암은 대운전 오른쪽으로 난 계단으로 한참 오르면  나타난다. 우화루라는 현판이 달린 누각이 있는데 특별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법당 외벽 양쪽에 우리나라 민화에서 나오는 호랑이와 토끼 그림이 누길을 끈다.

  처음 접한 봉정사에는 국보 2점 보물 4점 그리고 문화재 2점등 우리에게 귀중한 것을 보여 주는 사찰이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마루에 조용히 앉아 고즈녁한 분위기에 한번 젖어 하루종일 있어 보고, 영산암 가는길 옆으로 산 계곡의 오솔길도 걸어보고 쉽은 산사이다. 얼마전부터 일반인들에게 사찰 체험 기회도 제공한다니  언젠가 다시 한번 찾아 보고 싶다.

 

          여행정보

         1). 찾아가는길 
               * 버스 : 동서울 터미널 - 안동  ( 첫차 06:00 막차 21:20분)
                           부산 - 안동  ( 첫차 04:40  막차 19:40분)
              * 열차  : 청량리- 안동 (1 일 10회 )
                           동대구 _ 안동 ( 1일 3회)
        2) 위치 :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1번지
        3) 전화 :  대표 054- 853-4181  종무소 : 054- 853- 4183      

    

Posted by 혜 천

 
 어릴적 내가 살던 시골마을도 서민들의 마을이었기에
 흙 만든 흙담길로 기와대신 짚으로 이엉을 이어 만든
 
 흙담길이  있었다.

 옛날엔 자기가 살고있던 집의 영역을 나무를 둘러치거나
싸리나무로 얶어서 둘러쳐서 만들었다. 

대가집 담벼락은 돌담으로 만들어 그 집에 어울리는
 담길을 만든것이  아니겠는가.  그 곳들이 오늘날
명품길이 되어 찾는사람이 많게 되었다.     

           

    이렇게 모든 찾는 이들에게  추억을 남겨주는 담장길은 황토 흙과 돌이 함께 뒤섞여 있는 돌담,
 그 위에 기와장이 놓여 있으니 한층 정감가는 깥끔한 담장길이다. 

 익산에서 함라면 사무소와 함라초등학교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돌담길이 펼쳐진다.
    이곳엔 만석꾼 3가구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았기에 일찍히 부농촌으로 살았다고  한다.
 

    주인의 삶이 묻어나는 돌담길 ,서민들이 사는 마을의 돌담길은 흙으로 만들어 흙담길이며
    요즈음은 시멘트블록 담길이지만  부자들이 사는 마을의길은 돌만 쌓아만든 길이거나 황토와
    돌을 섞어만든 돌담길로 나누어 진다.

    제주도나 청산도 같이  돌로만 쌓은 돌담, 흙으로만 쌓은 흙담, 잔돌만 사용하여 만든 담등
    다양한 형태의 담도 볼수있다.  그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볼수있다.

 
 이 가옥은 조해영 가옥으로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121호로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에 위치하며 본래 안채를 비롯하여    여러 채가 있었다 하나 현재는 안채.별채 그리고 변형된 문간채만 남아있다.
안채는 1918년,별채는 1922년 되었으니 100 여년 된 가옥이라고 한다.

 

                    마을을 접어드니 곶감이 익어가고 있다.


                         부자들은  굴뚝에도 신경을 써서 만들었으니 모양도 아름답다
.

 

   높은 빌딩 아파트에서만 살아가고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흙향기를 맡으며 걷고 뛰어보는
  체험을 통해 전통문화를 몸과 마음으로 느낄수있는 체험도 좋지 않을 련지도 생각된다.
   이렇게 따스함을 머금은 돌담은
 누구에게나 그 온기를 전해줄  준비가 되어 있기에 돌담길을
    걸으면 편안해지는지 모르겠다.    

Posted by 혜 천

           
              기암괴석 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월출산 ,
            그 월출산 자락에 자라잡은 무위사가 있다.

              조선 시대 초기에 건립된 
            국보 제13호인 극락보전은 무위사 입구에서
            맨처음 대하는 해탈문을 지나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위치 해있다

              국보 제13호 극락전을 가진  무위사는 다른 사찰
            같이
호화롭지도
않고 웅장하지도 않다.   

            사찰에 올라가는 길도 어럽지않고 쉽게
            다가
갈수 있어 누구에게나
편안한 절이다.
 
              사찰은 그래야 많은 사람이 쉽게 부처님을
              만날수 있다고 생각되어 좋다.

             그리고 이곳엔 국보도 있고 ,보물도 있어
              옛 역사 공부하기도 좋은 사찰이라 좋다. 

             무위사 해탈문                                                                             

            무위사는 크고 웅장하게 솟아 있지도 ,허세를 부리지도 않았다,

            눈을 어지럽히는 화려한 단청으로 치장도 없는 無爲 그대로 였다.

 

        
              저만치 국보13호 무위사 극락보전이 보인다.    
                                                       
              
한점 군더더기 없이 소박하고 단정하고 아름다움을 갖춘것이 바로

              맞배지붕  형식의 무위사 극락보전이라고 보면된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 하는 낭랑한 불경 외우는소리가 들리는 법당의
 목조 아미타삼존불과 그뒤에 있는
 아미타불삼존도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가운데가 아미타불, 오른쪽 두건을
  쓴분이 지장보살,오른쪽 보관을 쓴분이
관음보살이다. 그래서 세분을  아미타삼존불 상이라고 부른다.

후불벽화(後佛壁畵)로 그려진 아미타삼존도. 흙벽에 채색. 210 × 270 cm. 1476년 작. 후불벽화로 그리기 위하여 따로 세워진 벽면에 그려졌다.

구도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앞의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배치하고 뒤쪽으로 6명의 나한(羅漢)을 배치하여 원근감을 표현하였으나 상하로 구분하는 2단구조의 고려 불화나 16세기의 조선 불화와도 다른 것이다.

아미타불의 뒤에 표시된 광배(光背)의 모양은 키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15세기부터 사용되었다. 착의법(着衣法)은 고려 후기의 단아양식(端雅樣式)을 계승한 것이며, 가슴 아래까지 올라온 군의(裙衣)의 상단을 주름잡아 고정시킨 매듭끈을 대좌(臺座) 좌우로 길게 드리운 것은 조선 초기의 특징이다. 내용상에서도 변화가 있다. 곧 고려시대의 삼존형식에 자주 등장하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대신 지장보살이 배치된 것은 고려 후기의 신앙대상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다. 화기(畵記)에 의하면 아산현감을 지낸 강노지(姜老至) 등 수십명의 시주로 혜련(海連) 대선사 등이 그렸다 한다. ( 자료 : 무위사 안내서)

 

         백의관음도는 보물 제131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극락전 후불 벽화               

         뒷쪽 벽면에 그려져 있다. 한참을 찾아야 볼수있는 백의관음도 이다.

         많은 사찰에서 관음도 벽화를 봤지만 이렇게 매료 시키는 백의관음은 없었던것
         같았다.     

무위사극락전백의관음도(無爲寺極樂殿白衣觀音圖) - 보물 1314호 

극락보전 후불벽화인 아미타후불벽화(보물 제1313호)의 뒷면 그림으로, 떠가는 듯 일렁이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백의관음보살이 그려진 벽화이다.

하얀옷을 입고 있는 백의관음보살은 당당한 체구에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돌린 채 두손을 앞에 모아 서로 교차하여 오른손으로는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서 있다. 간략화된 옷주름과 더불어 팔찌와 가슴장식 역시 간소화되어 있긴 하나, 힘있고 빠른 필치로 바람에 심하게 흩날리는 듯한 옷자락과 넘실대는 듯한 파도를 표현함으로써 강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관음보살의 뒤쪽으로는 해 모양의 붉은색 원이 그려져 있고, 앞쪽 위에는 먹으로 5언율시가 씌어져 있다. 그리고 앞쪽 아래 구석쪽으로는 둔덕이 마련되어 있고,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자세의 비구(比丘)가 자리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비구 어깨 위에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고 있는 새 한마리가 앉아 있는 것인데, 백의관음보살에 비하여 비교적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조선 성종 7년(1476)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앞면의 아미타후불벽화와 더불어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 자료 : 무위사 안내서)

 

극락전 내부 서측벽 중앙에 그려진 벽화이다.
극락전의 아미타후불벽화와 같은 시대에 제작되었다고 추정한다고 한다,
그 수법은 비슷하지만 좌상의 설법도와는 다른 입상의 아미타내영도이다.

아미타내영도
아미타불과 8보살, 8비구스님 등이 등장한 이 그림은 희귀한 조선조 아미타내영도를 대표하는 작품이라는데 큰 의의가 있다.
구름을 배경으로 하여 원형두광(圓形圓頭光)을 지니고 측면향을 한 아미타불은 삼산형의 머리 가운데 중앙계주만이 나타나고, 구불구불한 옷 주름선의 법의(法衣)를 입었다. 왼손은 들어 엄지와 장지(長指)를 맞대고 오른손은 내려 마치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모습을 취하고 잇는듯하다. 두건을 쓴 지장보살을 포함한 8보살 모두, 그들을 나타내는 특물(特物)을 들거나 보관(寶冠)에 그렸는데,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보살 옷으로 가슴 앞에 묶어 내린 천의(天衣)자락이 보인다. 8비구스님들의 다양한 자세와 얼굴표정은 변화 없는 그림에 활기를 주고 있다.

1476년의 아미타후불벽화와 비교하여 삼산형의 머리 가운데 중앙계주만 표현된 점, 고려 경변상도(經變相圖)의 것과 닮은 활달하고 구불구불한 필선(筆線)을 많이 사용한 점에서 다소 차이가 난다. 어쨌든 이 극락전은 벽면에 아미타내영도를 그려 모신 아미타전각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춘 유일한 곳이다.      ( 자료 : 무위사 안내서) 


                                   < 上 연화당초향로도   中 모당모란문도  下 당초문도 > 

      무위사 경내의 성보박물관에는 극락보전의 사면에 그려져 있던 벽화 29점이

     전시되어 있다. 극락보전내에 있던 것을 보물제1314호로 일괄지정 했다고 한다

 

         선각대사 부도비                                                           

     태조 왕건과 궁예의 치열한 싸움에서 희생된 선각대사를 기리기 위한 비로   통일신라의
     고승으로 법명은 향미이며 왕건을 도와 고려건국에 일조한 대사라고 한다.
 

      이번 연말 휴가때 남도여행 계획이 있으시면 월출산도 올라보고 무위사를 둘러보길
      권하고 쉽어 질 만큼 매료된 사찰이었습니다.. 
  
  여행정보  
 1. 위치 :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1175-1
 2. 전화 : 061-432-4974  
 3. 홈페이지:
http://www.muwisa.com
 4. 주위 볼거리 : 주위에는 대흥사, 도갑사,미황사,백련사등 이름있는 사찰이 많이있다. 
         

Posted by 혜 천


학생때의 기분으로 옆치기와 함께 가을 여행을 떠났다.
청도호반과 동곡의 아름다움 차창으로
내다보며
옛이야기에 여염없다.

소요당 박화담선생이 거주했던 운강고택 과 선암 서원을
 둘러보고  청도 석빙고 아래 정자에서  쉬어보기도 하고
 
유등리  청담 갤러리 2층커피 솦에서 군자정과 겨울준비
에  바쁜 연잎들을 내려다보며
 향이 좋은 진한커피 한잔
하며  그림을 감상한다.



연꽃은 엔만한 연못에 가면 쉽게 볼수있다. 그러나 저수지가 발달한 청도일대는 연향(蓮鄕)이다.
 
대구인근의
연꽃 명소인 유호연지(유등연지)는 청도 팔경중의 하나인 청도 화양읍 유등리의
유호연지는 7-8월 연꽃이 필땐는 화려한
연꽃 밭이 될것같다. 연꽃이 활짝 피었을때 청담갤러리에서 내려다보며 차한잔하는 아름다움을 느껴도 좋겠다.

2만여평의 연못에는 겨울을 준비하는 연잎과 겨울이면 앙상하게될 연대가 빼곡히 들어차있다. 입구에 있는 군자정에 오르면 더 좋을것 같은데 발을 디뎌보지 못하고 왔다.

무오사화때 유배된 이주선생의 동생 고성이씨 이욱이 은거하며
못을 넓히고 연꽃을 심으면서 연꽃명소로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유등연지 끝자락 에 아담한 갤러리 청담이 자리하고있다.  
아트갤러리 청담은 기존의 닫힌 공간으로서의
갤러리 분위기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함께하는 공간으로 만들어져 있는 곳이었다.

 평면 작품과 입체작품 그리고 우리생활 속에서 예술적 감흥을 느낄수있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마음의 양식을 보충하며 차한잔의 여유를 느낄수있는 공감 이었어 좋다.            





꽃과새, 사람의 꿈을 전하다.

작가는 며칠전 하던 작품을 다시 꺼내보지만 썩 ∼ 마음에 들지 않는다. 늘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너무 많은 이야기로 연마되어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기 때눈이란다.

꼭두의 조형성과 강한 원색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된 작업들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또 다른 이상세계에서 이룰수 있다는 도가의 신선사상에서 비롯되어 왔다.

작고 보잘것 없는 나무인형(꼭두)의 조형미는 민족적 정서와 해학이 있어 현대미술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무거운 조각적 특성보다는 깍고 붙이고 색칠하여 비조각적이고, 회화적으로 하늘을 나는 사람,꽃을든 사람, 새를 타고나는 사람,등 긴장된 현대인을 풍자적으로 해학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평범한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새에 태워보기도하고 그리운 사람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고 한다.     작가 말씀    




                                                                                                       

 



  대구수성못에서 청도방향 20분 거리의  청도 유호연지 내에 위치하고 1,000 여평의 대지의에 1전시실과 2전시실 2층 아트샵과 쉼터 그리고 3층에 펜션이 한칸 있다. 자연과 함께,
계절마다 다른 풍광을 볼수있는 장소라 소개한다.

 

          여행정보 
          1> 위치 : 경북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 31번지 (유호연지 내)
           2> 전화: 아트갤러리 청담  전화 : 054-371-2111 / 016-9772-1123             

Posted by 혜 천
 여름의 더위에 빙수 한그릇 시원하게 먹으면 얼마나
 좋은가.요즈음은 겨울에도 베스킨 라빈스 아스크림이
 불티나게 팔리는 세상이다.

그런데 옛날에는 냉장고도 없었으니 어찌 여름을
 지냈을까? 하는 생각이 많았는데 이곳 석빙고에서
그 해답을 찾게 되었다.

우리나라 선조들은 벌써 신라 지증왕 6년에 왕이
유사에게 얼음 창고를 만들라고 했다니 그 기원이 
참으로 오래 되었다고 볼수있다.
 
전국에 6개의 석빙고가 있으며 가장큰 석빙고는 경주
반월성에있는 경주 석빙고이며, 창녕,안동,창영 영산
현풍,그리고 가장 오래된 청도 석빙고가 있다.

이 청도 석빙고는 신라지증왕6년 진사 박상고가 1713년
2월 착공 5월에 준공한 것인데 당초 북문밖에 있던이
허물어져 이곳에 복원 한것이라 한다
.

    보물 제 323호 청도 석빙고는 조선 숙종때 만들어 진것으로 겨울에 자연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봄,여름에 사용하기 위한 얼음 저장고였다.

     석빙고의 입구 좌측에는 숙종 39년 (1713)에 세운 비가 있어 축조연대 및 인력과 공정기간
     등을 알수있다.  빙실 바닥은 길이 14.75 m 폭5m의 장방형 구조인데 내부 계단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경사졌고 중앙에는  배수구가 있어 경사를 따라 물이 외부로 배출
      되게 되어 있다.
 
       다듬은 돌로 윗부분을 반원형인 홍예로 틀어 올리고 잡석으로 벽을 쌓았다.
       현재 전국적으로  6기의 석빙고가 국가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에서
       도 이것이 가장 오래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바닥은 경사지게 만들어 믈이 한쪽으로 빠지도록 물배수구도있다

           양쪽벽을 이어주는 반원 아치형 홍예 (虹霓)가 4군데 남아 있을뿐 천정은 완전히
         무너져 하늘이 보이는
 석빙고이다. 

                                  사람이 올라가도 될만큼 튼튼하다


          여행정보      

            1. 위치 : 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천리 285

          2.주위 볼꺼리:  청도 향교, 청도 읍성,  청도 선정비군

Posted by 혜 천

경주 토함산 석굴암보다 100년 먼저 조성된 
제2 등 석굴암이 된 서운한 군위 삼존석불

경주 토함산  석굴암은 초등학교 수학 여행으로
인연을 맺어 몇번을 다녀온 일이 있지만  팔공산에
위치한 제2석굴 군위 삼존석불에 대한 여행은 처음이다. 

팔공산하면 대구에 있고 그 산의 정상에
부산 사람들이
즐겨 찾는 동화사 갓바위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팔공산은 대구 동구 용수동과
경북 영천 그리고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세 지역이 경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팔공산
 비로봉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는 군위 부계면
남산리 쪽 에서 거대한 바위산  절벽을 이루었고
이 절벽허리
20m 높이에  남쪽
으로 향한 둥근 천연동굴에 삼존불상을 봉안 하였으니 삼존석불이다. 

 
   * 이 석불은 1550년 전에 아도화상께서 수도전법하시던 곳이며 ,
    그후 원효대사께서 아미타불을
   조성 봉안하시고 해동제일의 석굴사원으로 신라불교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한다. 
 

 

이 삼존 석불(국보제109호) 은 제2 석굴암이라는 이름 때문에 경주 토함산 석굴암보다 뒤에 축조된 느낌을 주지만  실제로 경주 토함산 석굴암보다 약 100년정도 먼저 만들어 졌다고 한다.  거대한 절벽 바위벽 동굴에 대세지보살. 아미타불 , 관세음보살 삼존불이 봉안되어있는 모습은 신기하기만 하다. 

삼존석불 모전석탑
 단층 기단위에 단층의 탑신부를 형성한 특이한 형태로서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탑신부는 근세에 다시 축조되어 원형에서 변형되었으나 탑신을 유지하고 있는 귀중한
 유산이다.

 깍아지른 절벽위에 세워져 수백년동안 울창한 숲으로  덮여있고 가려있어 그누구도 몰랐기에  왜정 36년동안 일본놈들의 문화재 반출에 온전히 본존되어 지금 우리가 볼수있게 된것이라고 한다.

                                항마촉지임을 하고 계시는 아미타불

                                        비나불을 모시는 비로전


 근처 볼거리 둘러보기 


 
    * 양산서원 
        1786년 정조10년 지방교육기관이며 성현을 존숭하던 서원으로  부림홍씨 세거지로서
      선대 조상들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고 홍여하선생이 수찬한 휘찬려사(고려사)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여행정보
1.위치 :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1477 (군위삼존석불)
2.전화 : 054-383-8032  / 054-383-2020
Posted by 혜 천